홍명보, ‘국대’의 거품을 걷어내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7.3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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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뭔가를 빼는 시간…특유의 리더십으로 조직 관리

“사람들은 뭔가를 더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나는 지금 대표팀에서 뭔가를 빼고 있는 중이다.” 홍명보 감독이 7월24일 아시안컵 2차전 경기를 끝낸 후 남긴 말이다. 새롭게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그를 향해 많은 사람이 혁신과 변화를 바랐다. 무언가가 새롭게 추가되길 기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홍명보 감독은 덧셈이 아닌 뺄셈을 강조했다. 호주·중국·일본을 상대하는 동아시안컵은 홍명보 감독이 2014 브라질월드컵으로 가기 위한 대표팀의 뼈대를 만드는 시간이다. ‘천생 리더’로 평가받는 그는 특유의 리더십을 앞세운 조직 관리로 대표팀을 둘러싼 거품을 빼는 중이다. 지난 3년간 대표팀을 추락하게 만든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팀 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 홍 감독이 꺼내든 칼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 연합뉴스
대표팀의 의미 각인시키다

홍 감독은 지난 6월24일 축구 국가대표(국대)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축구계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바로 기성용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논란이다. 기성용은 2012년 초 지인들만 볼 수 있는 자신의 페이스북 부계정에서 당시 최강희 대표팀 감독에 대한 ‘험담’을 남겼다. 이 ‘비밀 계정’의 적나라한 내용이 7월 초 한 인터넷 칼럼을 통해 공개되며 사태는 일파만파 퍼졌다. 대한축구협회가 따로 징계를 내리지 않자 여론의 관심은 홍명보 감독에게 집중됐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그가 기성용에게 선발 제외와 같은 전격적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홍명보 감독은 ‘읍참마속’은 택하지 않았다. 단죄 대신 ‘묵직한 메시지’를 기성용에게 보냈다. 그는 “이번은 기성용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경고이며, 다음은 축구와 동일한 퇴장을 부여한다. 기량만이 대표팀 선수의 선발 기준은 아니다. 특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외부와 소통하려고 들지 마라”라고 공식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기성용의 능력이 탁월해도 자신의 대표팀 운영 원칙인 ‘하나의 팀, 하나의 정신, 하나의 목표’에 부합하지 못하면 제외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기성용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성숙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의미였다. 홍 감독은 기성용 하나를 죽이기보다는 더 나은 선수를 살리기 위해 말의 날을 세운 것이다.

홍 감독은 기성용의 SNS 논란으로 확인된 대표팀 내의 와해된 분위기를 만든 환경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래서 대표팀 소집에 대한 지침을 내렸다. 선발된 선수는 대표팀에 입소할 때 슈트와 와이셔츠, 넥타이, 구두를 착용해야 하고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파주 NFC) 입구에서 차를 내려 숙소가 있는 본관까지 직접 걸어 들어가야 했다. 언젠가부터 대표팀에 오는 선수들은 연예인처럼 돼버렸다. 대표팀에 소집돼 있는 동안에도 팀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더 어필하려 했다. 자신의 에이전트가 모는 고급 외제차를 타고 본관에서 내렸다.

홍명보 감독은 하나의 거대한 쇼케이스가 돼버린 대표팀 입소 과정을 대표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으로 바꾸었다. 그것이 정장 착용과 200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들어오는 과정이었다. 선수들은 7월17일 홍 감독의 지침에 따라 입소하면서 “예전엔 차로 가던 이 길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파주 NFC 입구에서 이어지는 경사진 언덕길은 이제 대표팀에 뽑힌 선수들이 태극마크의 의미를 깨닫는 길이 됐다. 홍 감독은 입소 당일 선수들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며 솔선수범했다. 그는 대표팀의 기강과 질서, 책임감과 자부심을 다시 세웠다.

“11명이 아닌 23명의 주전, 우린 팀이다”

동아시안컵에서 홍 감독은 흥미로운 선수 기용 형태를 보였다. 첫 번째 경기였던 호주전과 두 번째 경기였던 중국전에서 그는 무려 9명이 바뀐 선발 라인업을 내놓았다. 그 두 경기를 통해 그는 이번 동아시안컵을 위해 부른 23명의 선수 중 백업 골키퍼인 이범영을 제외한 22명을 모두 썼다. 골키퍼 포지션은 사실상 거의 변화를 주지 않는 특성을 감안하면 모든 선수에게 기회를 준 셈이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010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 대표팀은 파벌설과 갈등설에 시달렸다. 남아공월드컵 이후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조광래 감독은 유럽에서 뛰는 젊은 선수들 중심으로 재편했다. ‘편애’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유럽파를 아꼈다. 조광래 감독의 철학은 ‘2014년을 목표로 하는 만큼 가능성 있고 기술과 축구 지능이 높은 유망한 선수들에게 기회를 몰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대표팀의 또 다른 절반인 국내파의 반발을 샀고 조광래 감독은 한일전 참패(0-3)와 3차 예선에서의 패배로 경질되고 말았다.

조광래 감독의 뒤를 이은 최강희 감독은 그 반대의 방식을 택했다. 그는 유럽파에 대한 특혜를 차단했다. ‘대표팀은 국내파·유럽파 구분 없이 그 시점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를 즉각적으로 쓰면 된다’는 것이 최강희 감독의 철학이었다. 이번엔 기득권을 잃은 유럽파가 반발했다. 기성용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겼다는 글도, 요지는 자신을 비롯한 유럽파가 손해를 본다는 내용이었다. 최강희 감독은 소속팀에서 경기를 뛰지 못하는 박주영을 일찌감치 제외했고 마지막 최종예선 3연전에는 기성용·구자철도 뽑지 않았다.

홍명보 감독은 부임 직후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며 국내파와 유럽파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없애는 데 집중했다. 그는 “소속팀·기량에 관계없이 ‘우리는 하나다’라는 팀 정신에 입각하지 않는 선수는 선발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출신 성분을 논하지 말고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라는 정체성을 되찾으라는 일갈이었다. 이번 동아시안컵에는 K리그 FC 서울 소속인 하대성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다. 그는 과거 박지성처럼 조용하면서도 행동하는 리더십으로 인정을 받아왔다. 하대성은 홍명보 감독의 뜻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국내파와 해외파로 구분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홍명보 감독은 동아시안컵에서 호주, 중국을 상대로 잇달아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첫 승’ 그리고 최근 대표팀의 주요 문제로 지적받고 있는 ‘득점력’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 거스 히딩크 감독처럼 ‘마이웨이’를 외쳤다. “첫 승과 첫 골은 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선수들이 짧은 시간에 동아시안컵을 잘 마무리하고 다음에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얻을 수 있다면 첫 승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중국전이 끝난 후 그가 던진 말이었다. 홍명보의 로드맵은 브라질월드컵까지 연결돼 있고 그의 시선은 눈앞의 승리가 아닌 2014년을 향해 있다.

홍 감독은 동아시안컵을 정예 멤버로 구성하지 않았다. FIFA(국제축구연맹) 소집 규정으로 인해 유럽파는 부를 수 없지만 이동국·곽태휘·이정수·이근호 등 국내와 아시아 무대에서 뛰는 베테랑은 부를 수 있었다. 그가 23명 선수 중 무려 16명을 1988년생 이하 어린 선수로 구성한 것은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다. 동아시안컵 해설을 맡고 있는 신태용 전 성남 감독은 “이런 식의 팀 운영은 대단한 배짱이다. 홍명보라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건 브라질월드컵에 갈 수 있는 숨은 진주”라고 말했다.

동아시안컵을 통해 대표팀에 새로운 뼈대를 잡은 홍명보 감독은 8월부터 11월까지 열릴 7회의 A매치를 통해 살 붙이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 기간에 그는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 그리고 브라질에 함께 갈 만한 베테랑 선수들을 차례차례 불러들여 팀 전력을 극대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연이은 무득점 행진에 대해 “그 부분은 중요한 문제다. 9, 10월에는 준비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 것은, 현재는 수비 안정화와 선수 기량 확인에 그치고 있지만 어느 타이밍에는 팀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선택을 할 것이라는 예고다.

홍 감독은 동아시안컵을 위해 선수를 소집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대회에서 우리의 목표는 당장의 승리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성과보다는 비전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비록 동아시안컵의 경기 결과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홍 감독은 자신이 설정한 그 길을 걷고 있다. 자신과 팀을 흔드는 얘기를 단호하게 칼로 베어나가는 홍명보의 ‘마이웨이’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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