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게 복수의 완성”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07.3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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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로 광주의 상처 달래는 소설가 김경욱

‘5월 광주’를 변주한 소설이 또 나왔다. 1980년 당시 초등학생이던 김경욱 작가(42)는 광주 태생으로 광주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광주 시민인 그가 몰랐다니, 그를 탓하기 전에 당시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였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광주 출신임에도 대학에 가서야 ‘광주의 진실’을 떠도는 소문이 아닌 날것으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광주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했다. 그런데 20여 년이 훌쩍 지나서야 책으로 엮을 수 있었다. 대하소설을 쓰려고 해서 늦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후일담 문학’ 전성기 때 임철우·문순태 등 많은 선배 작가가 썼다. 그는 차별화한 ‘80년 광주’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이다. 7월23일 그를 만나 또 다른 광주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장편소설 를 펴낸 김경욱 작가는 1993년 신인상에 중편소설 가 당선돼 등단했다. ‘소설 기계’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서사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복수를 위한 여정을 담았다.

1980년 5월 광주 한복판에서 한 사내의 동생이 계엄군에게 맞아 죽임을 당한다. 그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며 30년 세월을 살아내고서야 복수를 하러 떠난다.

그런데 제목은 ‘야구란 무엇인가’다. 금서를 위장하려 다른 책 표지를 씌운 느낌이 드는데.

1980년대에 광주 시민의 감정이 프로야구에 투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늘 해태 타이거즈가 떠오른다. 해태 타이거즈는 광주 시민의 아픔을 위로하고 응어리를 풀어주던 매개체였다. 사내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해태 타이거즈를 좋아하고 야구 경기에 몰입한다. 그런 아버지도 결국 화병으로 죽고, 복수를 하러 떠나는 여로에 사내는 어린 아들을 대동한다. 자폐를 앓는 아이와 소통을 전혀 할 수 없는데, 여행을 떠나면서 야구를 통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야구가 없었다면 아이와 영영 얘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야구를 통해 광주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야구가 이 소설에서 상징하는 것이 그것 말고 또 있나.

이 이야기를 쓰면서 30년 만에 복수에 나선 이 사내와 아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야구가 살아서 홈으로 돌아가려 애쓰는 경기인 것처럼 복수와 무관하게 주인공들이 꼭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소설에 투영했다.

야구는 다른 구기 종목과 달리 공이 아닌 사람이 들어와야 이기는 경기다. 그런 것이 연상된다.

야구는 좀 철학적이지 않은가. 경기를 보는 사람도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되는…. 그래서 소설에서 사내가 야구의 룰에 빗대서 아이와 대화를 확대해나가는 것으로 설정했다.

광주 이야기를 야구에 빗댄 것인가.

해태 타이거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80년 광주’의 분위기를 말할 때 해태 타이거즈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계엄군이 사내의 동생에게  주사위를 던지라고 하는데.

이 주사위가 상징적인 것이다.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고 있던 그날의 광주, 그저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형제는 군인에게 불심검문을 당한다. 군인은 형제에게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보라며 동생의 주머니에서 나온 주사위를 내민다. 선택의 여지는 없으므로 사내의 동생은 주사위를 던지는데, 영특했던 동생은 주사위가 숫자를 내보이기 전에 입으로 삼켜버린다. 결국 동생은 그를 괘씸하게 여긴 군인들에게 가혹한 구타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숨지고 만다.

지금도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의 흑백논리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런 의도로 쓴 건가.

지금도 이 편 저 편 가르고, 아니라고 하면 ‘증거를 대봐’ 하는 식이지 않나. 어떤 증거가 있어서 의심을 하는 게 아니고, 일단 낙인을 찍는 것이다.

자신을 어떤 작가라고 생각하나. 현실에 참여하는 편인가.

많은 이가 그렇듯 작가도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다만 개인 문제에 매몰되어서는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자신이 속한 동시대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할 말이 있으면 그것을 글로 쓸 뿐이다. 이런저런 현실을 특별히 고려해서 쓰지는 않는다.

‘작가의 말’이 짧다. 원래 안 하는 편인가.

작가가 작품 외의 말을 하면 독자가 작품에 대해 규정을 하게 된다. 작가가 한 말이 독자가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하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을 방해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그런 것이다.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가의 세계관은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낸 소설을 보니 등단할 때와 작품 세계가 많이 변한 것 같다.

문학은 소외당하고 패배한 자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당대에 대한 해석을 하는 데 인간의 욕망이 집약된 대중문화를 빼놓을 수 있을까. 그래서 20대 때는 대중문화 코드를 많이 썼다. 그랬는데 세계관이 세월 따라 조금씩 바뀌면서 소재를 고르는 것도 달라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를테면 장국영이 사망했을 때 한 시대가 넘어가는 걸 느꼈다. 그때 <장국영이 죽었다고?>를 내고, 그 후로는 좀 다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복수에 성공하는가. 야구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것과 상관있나.

소설은 잠실야구장에서 끝난다. 경기가 끝난 후 아이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캠핑을 하던 사내는 마음속으로 ‘집에 가자. 무사히, 살아서 집에 돌아가자’고 외친다. 복수 대상인 계엄군을 찾았지만 그 또한 뺑소니차에 치여 병상에 누운 신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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