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뮤지컬보다 더 재미있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7.3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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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만원사례…윤호진·황호준 등 공연예술계 고수 영입

창극.

일본에서 수입된 신파극 얼개에 기존 판소리 다섯 바탕소리를 덧입혀서 만들어진 장르다. 20세기 초에 발명돼 1940년대 절정기를 맞이한 뒤 한국전쟁 이후 TV·영화 매체로 대중문화의 주류가 이동된 이후 판소리와 함께 급속히 쇠락했다.

요즘 창극이 달라졌다. 뮤지컬·오페라·영화보다 더 과감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과 유럽의 내로라하는 작곡가·연출가들이 창극에 참여하고 관객 또한 몰린다.

2012~13시즌에 처음 시작된 국립창극단 연간 프로그램에는 뮤지컬의 대부 윤호진(<서편제>)과 유럽의 대표적인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수궁가>) 등 공연예술계의 대가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1년이 지나고 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창극)의 완성도와 흥행은 기존 창극이 갖고 있던 기록을 깼다. 연극성이 강화된 <장화홍련> <서편제> <배비장전>은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국립극장에서 공연되는 상업 뮤지컬을 능가하는 흥행 기록을 세운 것이다.

창극 의 한 장면. ⓒ 국립창극단 제공
제2의 붐 맞이한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국립창극단에 마술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국립창극단의 극적인 변화는 문호 개방을 통해 이뤄졌다. 2012년 3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에 임명된 ‘연극인’ 김성녀는 연극계의 엘리트를 섭외해 대거 창극 창작에 투입했다. <심청가>-<춘향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 다섯 바탕으로 ‘돌려막기’를 하던 레퍼토리의 틀을 깬 것. 기존 작품이라도 현대적인 연출을 적극 수용했다. 독일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의 영입도 그런 차원에서였다. 서양 오페라에서 현대식 연출은 이미 대세다. 란제리 바람으로 치정극을 벌이는 <므첸스크의 백작 부인>, 아프리카의 가면쇼와 서커스적인 요소를 적극 끌어들인 <마술피리>는 더는 뉴스가 아니다.

반면 발명된 지 100년밖에 안 된 창극은 쪽 지고 한복 입고 나와 19세기에 정형화된 판소리 다섯 바탕을 20세기 초반 형식으로 50년 동안 반복해왔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까지 극단이 찾아가던 창극은 점점 나이 든 계층, 특별한 마니아만 즐기는 마이너 장르로 전락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특별 보호에 나서지 않았다면 멸종됐을 것이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국악계 내부에서 나왔다. <시사저널> 지면에서도 소개한 창작 판소리를 하는 이자람, 판소리 뮤지컬을 하는 극단 타루나 바닥소리, 창작 국악을 동시대 연주곡으로 영화·연극·무대 공연을 통해 소개해온 원일과 푸리, 민요를 재발견시킨 소리꾼 김용우 등 젊은 국악인이 동시다발적으로 ‘현재형 국악’을 내걸고 나선 것. 이들은 관(官)의 지원 없이 자체 공연으로 수익을 얻고 팬클럽이 만들어질 정도로 지명도를 얻었다.

김성녀 예술감독은 젊은 국악인의 성과를 대거 끌어들였다. <사천가>로 창작 판소리 장기 공연을 이끌어낸 이자람-남인우 콤비를 끌어들여 <내 이름은 오동구>를 만들었고,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원일을 <장화홍련>의 음악감독으로 영입했다. <배비장전>과 <메디아>의 음악을 맡은 작곡가 황호준은 판소리 집단 ‘바닥소리’와 함께 2011년 ‘잔혹 소리극’ <간밤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국립오페라단의 의뢰를 받아 창작 오페라 <아랑>을 작곡하기도 한 황호준은 “<메디아>에서는 <간밤 이야기>에 썼던 기법을 30% 정도 차용했다”고 말할 정도다. 1990년대 이후 자생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국악 현대화의 성과를 제도권인 국립창극단이 흡수한 것이다.

‘작곡가 황호준’은 ‘오늘의 국악’을 바라보는 스펙트럼이기도 하다. 소설가 황석영의 아들이라는 소개를 하지 않더라도 오페라 팬이라면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의 창작 오페라 <아랑>의 작곡가로, 걸 그룹 티아라의 팬이라면 지난 4월 발표한 신곡 <전원일기>의 편곡자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TV 특집 프로그램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는 김수희의 편곡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장르를 넘나들며 그는 ‘지금 여기 사는 사람의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서울에서 <메디아>를 올릴 때 그는 동시에 광주시립국극단에서 <심청>을 올렸다. 7월에는 전남도립극단과 함께 ‘액션 창극’ <홍길동>을, 11월에는 광주·대구에서 광주시립국극단과 대구시립국악관현악단의 합동 공연 <심봉사전>을, 서울에서는 서울시립오페라단이 위촉한 창작 오페라 <당신 이야기>를 올린다. 그는 2003~06년에 ‘우주낙타’라는 월드 뮤직팀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행보는 “음악에서 동시대성을 가장 크게 고민한다”는 그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그가 음악을 시작한 동기와 관련이 있다.

1972년생인 그는 <장길산>을 집필 중이던 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해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78년 광주로 이사했다. 1980년 5월 초등학교 2학년 학생 황호준은 광주 기독병원 옆에 살았다. 어린 호준은 그해 5월18일 이후 쉴 새 없이 병원으로 실려 오는 부상자와 사망자를 바라봤다. 그의 어머니인 소설가 홍희담은 피를 철철 흘리는 부상자가 실려 오자 어린 호준의 허리띠를 빼 지혈을 시켜주기도 했다. 밤이면 달달거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황호준은 “지금도 군인들이 쫓아오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창극 작곡가 황호준이 7월18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의 아들이다. ⓒ 시사저널 박은숙
자생적으로 활동하던 젊은 국악인 결집

1982년 그의 집 2층에서 특별한 작업이 이뤄졌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사망한 윤상원 열사와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이를 테이프로 담는 작업이 그의 집에서 이뤄진 것.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창문마다 담요를 둘러치고 가정용 녹음기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녹음됐다. 호준은 이 작업을 부모님의 무릎 위에서 지켜봤다. 호준은 “두어 달 후 뉴스를 보는데 시위하는 학생들이 그 노래를 부르더라. 대단해 보였다. 저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 꿈이 뭐냐고 물으면 작곡가라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광주의 기억은 성장기에 그를 지배했다. ‘내가 거리로 나가야지 피아노만 쳐서 되겠나’라는 생각에 중3 때인 1987년에는 한 달 이상 거리에서 보내기도 했다. 고민 끝에 국악을 하기로 결심하고 광주예고에 진학했지만 전교조 사건이 터지면서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가 퇴학 처분을 맞았다. 그 후 형광등 공장에 취직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검정고시로 중앙대 국악과에 진학했다.

광주에 대한 기억은 그의 음악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사명감 같은 게 나를 눌렀다. 음악 자체가 인간에게 주는 감동보다는 ‘이 음악이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나, 내가 왜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는 요즘 국경을 넘어 음악의 뿌리와 현재형 음악을 탐험하고 있다. 그리고 창작 오페라 작곡 의뢰와 뮤지컬 작곡, 창극 작곡 의뢰가 가장 몰리는 ‘인기 작곡가’가 됐다. “나는 ‘뮤지컬을 해야지, 오페라를 해야지’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일단 대본이 주어지면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에 집중한다. 가수들의 가창 특성이 무엇인지가 내게 중요하다. 성악가가 잘 표현하는 방식은 오페라이고 판소리 가수가 잘하는 방식이 창극이다. 그분들이 가창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선율 라인을 고려한다.”

오페라 <아랑> 작업에서도 그는 서양식 성악 발성법에 익숙한 가수를 고려하는 한편, 받침 있는 분절적 소리 특성을 지닌 우리말 발성을 감안한 멜로디를 짰다. 그래서일까. 그가 작곡한 <아랑>의 아리아는 가사가 잘 들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창극에서도 이 원칙은 지켜진다. 그는 판소리에 대해 “판소리는 3인칭 전지적 시점에서 이야기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의 ‘보이스 구라 판타지물’이다”라고 말했다. “판소리는 소리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상황을 설명식으로 전달하는데 현대극은 등장인물이 각자의 캐릭터와 정서를 바탕으로 연기를 하기 때문에 서양극을 창극에 얹으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메디아>가 서 있다. 그리스 비극 <메디아>를 창극 양식으로 도전한 것. <메디아>는 관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황호준은 전통 판소리 창법으로 부른 눈대목(판소리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세 곡 정도 배정한 것 외에는 기존 창극의 틀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의 노래가 들어가야 한다는 원칙보다는 그게 극적으로 타당한가의 고려가 먼저였다. 세 곡도 극적으로 타당하다고 연출가와 합의하고 넣었다”고 설명했다. 대신 코러스를 적극 활용해 극의 정서와 스토리를 끌어나갔다. 코러스는 수시로 ‘죄를 짓는 것은 남자, 벌을 받는 것은 여자’라는 메인 테마를 불러 관객에게 강력한 멜로디 라인을 남긴다.

“창극에 대한 기존의 보수적 태도도 존중받아야 한다. 창극단의 기존 방식도 존중하고 그들이 자주 쓰던 음 표현도 써주고 자신감도 주고 싶었다. 좀 더 파격적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서사든 우리 창극에 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창극은 엄밀히 말하면 한국적 극 양식으로 정착된 단계가 아니다. 아직은 열려 있고 길을 모색하는 단계다. 창극은 우리 소리만의 독특한 가창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우리만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가능성을 가진 장르”라고 말했다. 전통 다섯 바탕에 갇혀서 대중과 만날 기회가 적었던 판소리 가수들은 <메디아>에서 어느 장르의 가수보다 정확한 발성과 엄청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임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2012~13시즌에 처음 도입된 국립창극단의 레퍼토리제는 창극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완성도나 관객 반응이 웬만한 뮤지컬 작품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메디아>는 황호준과 연출가 서재형이 너무 바빠서 공통된 스케줄을 잡지 못한 탓에 재공연이 내년 가을로 미뤄졌다. 대신 황호준이 음악감독으로 참가한 이병훈 연출의 <배비장전>은 오는 12월 국립극장 대극장으로 터를 더 넓게 잡아 재공연이 이뤄진다.


ⓒ 국립극장 제공
대중에게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김성녀’보다는 배우 김성녀라는 표현이 더 익숙할 것이다. 마당놀이의 프리마돈나이자 연극배우로 더 잘 알려진 그는 1970년대 말 국립창극단 단원 4년, 국립극단 4년 등 도합 8년을 국립극장에서 보낸 인연을 갖고 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배웠고, 가야금 병창 이수자이자 중앙대 국악대학장이기도 하다.

1986년 극단 미추에 입단하면서부터 기록한 마당놀이의 상업적 성공과 연극인으로서 구축한 탄탄한 입지 때문에 대중은 연극배우로 그를 기억한다. 그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에 취임하자 그간 연극판에서 쌓아올린 내공을 창극에 불어넣고 있다.

김성녀 감독의 목표는 뚜렷했다. “창극단 감독이 된 것은 일종의 귀향이다. 내가 창극에서 출발했고 주인공으로 활동도 해봤다. 창극이 대중에게 어필되기보다는 마니아층에서만 소비되는 측면이 있었다. 내가 밖에서 바라보면서 아쉬웠던 점을 펼쳐보겠다. 창극을 공연예술의 중심으로 만들겠다.”

그가 연극이나 뮤지컬 장르의 요소를 창극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그는 “어느 작품이든 100% 다 좋아할 수는 없다. 창극은 그동안 한쪽으로만 치우쳐왔다. ‘이것이 창극이다’가 아니라 ‘창극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창극은 문호를 넓혀야 한다. 창극은 완성된 장르가 아니다. 정형화된 게 아직 없다.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가야 더 풍성해지고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관객 반응도 좋다. 지난 시즌 레퍼토리 중 <서편제> <장화홍련> <배비장전>은 ‘만원사례’ 봉투를 돌렸다. <메디아>도 대극장 객석 점유율이 80% 이상이었다. 김 감독은 “<서편제>에서 피아노를 반주 악기로 쓴다고 화를 내고 나간 관객이 한 명 있었지만 대부분 반응이 좋았다. 안숙선 명창이 매진이라고 하자 눈물을 글썽였고, 나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전했다.

김성녀 예술감독의 실험은 2013~14시즌에도 계속된다. “내 임기가 3년인데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 내가 주도한 작업이 실패할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 창극이란 장르가 매력적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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