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술 파티 때 비자 금 뭉텅뭉텅 빼냈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3.07.1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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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연루된 비자금 및 살인청부 사건은 한편의 영화다. 흥미로우면서도 때론 황당하다. 이재현 회장과 그의 친구들이 고급 룸살롱에서 술 파티를 하는 동안, 그들의 운전사들은 이 회장의 비자금으로 사설 도박과 땅 투기를 벌였다. 이런 과정에서 돈 문제가 꼬이며 청부 살인 사건으로까지 번졌다. <시사저널>은 여러 증언과 수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했다.

 

7월1일 재벌 총수 한 명이 또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재계 14위 CJ그룹 이재현 회장이다. 재벌 수사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한 세금 탈루 및 횡령·배임 혐의다. 그 규모는 1500억원대에 달한다. 이 회장은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510억원대 세금을 포탈하고, CJ제일제당 거래 내역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회사 돈 600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다. 여기에 일본 도쿄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CJ 일본법인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등 회사에 350억원대 손실을 입힌 혐의다. 검찰은 추가로 외환거래법과 자본시장법 위반 의혹도 들여다보고 있다.

이재현 CJ 회장이 지난 6월25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삼성가 비운의 장손 이재현 회장. 그에 대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정은 각별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나면서 손자 역시 일찌감치 삼성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다.

은둔의 경영자로 좀처럼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던 그가, 검찰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세 번째.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 뇌물 수수 의혹 사건 때,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수사 때,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게 세무조사 무마를 청탁한 의혹이 불거졌을 때다. 그때마다 이 회장은 검찰의 그물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번엔 검찰의 저인망 수사를 피해가지 못했다. 경제민주화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상황도 이 회장에게는 불리하다.

술·돈·폭력 얽힌 ‘코미디 영화’

기자는 ‘CJ 비자금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흥미로운 비화를 접했다. 이 회장과 호형호제했던 절친한 지인, 이 회장과 고급 술집에서 자주 만났던 ‘술친구’ 등의 다양한 증언을 들었다. 경찰·검찰 등 수사 당국의 기록도 접했다.

이재현 회장을 영어(囹圄)의 신세로 만든 ‘CJ 비자금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 같다. 때론 흥미로웠고 황당했다.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있고,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있다.

굳이 장르를 구분한다면 코미디에 가깝다. 재벌과 그 친구들의 고급 룸살롱 술 파티에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여기에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등장한다. 게다가 청부 살인 사건까지 겹치면서 폭력 장면도 삽입돼 있다. 흥행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 같은 현실에 CJ그룹의 최고경영자 이재현 회장이 출연한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이 회장과 그를 둘러싼 주변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앞서 언급한 이 회장 지인들의 증언과 수사 기록 등을 근거로 CJ 비자금 및 청부 살인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 회장은 2006년 우연한 계기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는 신 아무개씨를 알게 됐다. 신씨는 한때 주먹 세계에 몸담았던 인물. 살인죄로 중형을 선고받은 그는 수감 도중 ‘진범’을 실토하면서 무죄로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신씨의 전과 사실을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신씨는 음악계에서 큰돈을 번 ㅇ씨의 후원을 받아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신씨의 입장에서, 엔터테인먼트업계의 절대 강자인 이재현 회장은 놓칠 수 없는 사업 파트너이자,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이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ㄱ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재현이 형은 대단히 순진하고 순박하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신씨가 우연히 재현이 형을 알게 됐다. 형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니까 M&A(인수·합병)를 작심하고서 형을 고급 룸살롱으로 데리고 갔다. 이른바 ‘텐프로’였다. 순박한 형이 신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고 말했다.

신씨를 만나면서 이 회장의 생활도 바뀌었다. 서울 강남의 고급 룸살롱에서 자주 술 파티를 가진 것이다. 주요 멤버는 이 회장과 신씨 그리고 신씨가 잘 아는 사업가 김 아무개씨 등 셋이었다. 하룻밤 술값으로 1000만원 이상을 쓰기도 했다. 자주 새벽 2~3시까지 이런 유흥이 이어졌다는 게 이 회장 지인의 전언이다.

기자는 지난 6월 말, 수소문 끝에 룸살롱 멤버였던 김씨를 어렵게 만났다.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만 이런 일화를 전해줬다. “이 회장과 단골 고급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다 내가 여자 연기자 한 명을 그곳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 회장이 보통 사람들처럼 아주 좋아하더라. 내가 속으로 ‘재벌가 회장이 이런 것도 몰라서 저렇게 좋을까’라고 놀랬을 정도다. 이 회장은 그때까지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자 굉장히 즐거웠던 것 같다. 아주 순진한 사람이다.” 김씨는 “보통 사람들은 술친구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 회장은 편하게 속을 터놓고 함께 술을 마실 패밀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김씨는 이 회장과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종종 신씨와 김씨 등은 평소 알고 지내는  여성들을 룸살롱으로 초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관계를 염두에 둔 신씨가 이 회장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이다. 이 회장은 ‘신-김’ 두 사람과 어울리기 전에는 룸살롱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현-신씨-김씨’가 양주잔을 부딪치고 있을 때, 그들의 비서 겸 운전기사 세 명은 밖에서 대기하며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회장의 집사 겸 운전기사 이 아무개씨, 신씨의 운전기사 박 아무개씨, 김씨의 운전기사 염 아무개씨 등이었다. 이 회장의 집사 노릇을 한 이씨는 CJ그룹 재무2팀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신씨의 운전기사 박씨는 자신이 모시는 신씨처럼 주먹 세계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검찰이 지난 5월21일 CJ그룹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 연합뉴스
집사, 이재현 비자금으로 사설 경마

모임도 잦고, 한번 모이면 6시간 정도 술자리가 이어지다 보니 이들끼리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세 명의 운전기사 가운데 ‘이-박’이 특히 가깝게 지냈다. 호형호제하며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았다. 사단은 거기서 벌여졌다. 이 회장을 구속시킨 ‘CJ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어느 날, 박씨는 이씨가 이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집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박씨는 이씨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이씨를 ‘형님’으로 불렀던 박씨는 “형님, 제가 사설 경마 하는 애들을 잘 알고 있는데, 하루만 돈을 대면 10% 이자를 줍니다. 손해 볼 것 없으니, 돈을 한번 빌려주는 게 어떨까요”라고 꼬드긴 것이다. 고민 끝에 이씨는 ‘이재현 비자금’ 가운데 3억원을 박씨에게 건넸다. 며칠 후 이씨의 수중으로 이자 10%가 합쳐진 3억3000만원이 되돌아왔다. 유혹의 수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그 다음 주 사설 경마 경기를 기다렸고, 똑같이 3억원을 박씨에게 빌려줬다. 역시나 3000만원의 이자가 붙어 되돌아왔다. 앉은 자리에서 2주일 만에 6000만원을 거머쥐게 된 이씨는 박씨의 세 번째 제안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씨가 “형님, 이번에는 20억원을 투자해봅시다”라고 제안했다. 이미 ‘돈맛’을 본 이씨는 마약에 취한 듯 박씨에게 20억원을 선뜻 건넸다. 하지만 다음 날, 이씨는 박씨로부터 “형님, 큰일 났습니다. 돈을 (사설 경마에서) 잃었습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이-박’ 두 사람은 대판 싸웠다. 그러면서 이 회장의 술 파티 멤버인 김씨의 운전기사 염씨가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됐다. 운전기사 중 가장 연장자였던 염씨는 두 사람을 크게 꾸짖었다.

박씨는 이씨에게 “형님, 잃어버린 20억원을 한꺼번에 만회하려면 200억원을 투자하면 됩니다. 한 방에 되찾읍시다. 방법이 없습니다”라며 다시 꼬드겼고, 이씨는 어쩔 수 없이 200억원을 건넸다. 하지만 또 실패. 3개월 만에 220억원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 회장 비자금을 관리하던 이씨는 훗날 검찰에서 “당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씨는 박씨에게 “나 죽게 생겼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며 멱살잡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이씨는 “이 회장의 비자금은 8000억원, 1조원에 육박한다”며 “그런데 내가 관리하는 돈은 2000억원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관리하고 있다”고 까발린 것이다.

이러한 이씨의 당시 주장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많다. 사실 여부도 확인해야 하고, 법적으로도 따져볼 부분이 적지 않다. 다만 이씨가 거액의 이 회장 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돈 문제가 결국 청부 살인으로 이어져

이씨가 거액의 자금 관리 사실을 털어놓자, 이번엔 술 파티 멤버인 김씨의 운전기사 염씨가 이씨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우리 회장(김씨)이 요즘 강화도 지역 땅을 자주 보러 다닌다. 그 땅이 조만간 개발되면 열 배 이상 뛸 것이라는 정보가 있다”고 이씨에게 귀띔했다. 당시 실제로 김씨는 강화 지역을 6개월 정도 돌며 지주들에게 땅을 팔 것을 요구했고, 거의 설득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날 김씨가 가보니 지주들이 한결같이 “땅을 안 팔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씨는 지주들이 왜 그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아보니 운전기사 이씨가 이재현 회장의 비자금 170억원으로 김씨가 사려고 점찍어뒀던 땅 10만평가량을 먼저 매입했던 것이다. 이씨는 김씨가 애당초 사려 했던 땅값보다 비싸게 값을 치렀다. 지주 입장에선 비싸게 파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땅 명의를 박씨 측근 이름으로 등재했다는 점이다. 이 회장 돈으로 땅을 산 이씨가 자신 명의로 등재하기 힘들어 명의를 빌린 것이다. 이 명의 문제가 훗날 발생한 청부 살인 사건의 불씨가 됐다. 어쨌든 ‘이재현 비자금’ 2000억원 가운데 사설 경마(220억원)와 땅 매입(170억원)으로 390억원 정도를 운전기사가 쓴 셈이다. 부동산 정보를 제공해준 대가로 이씨는 염씨에게 3억원을 따로 챙겨줬다. 염씨의 말대로, 이씨가 샀던 땅값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솟았고 200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이씨는 사설 경마로 날린 돈을 메우기 위해 박씨에게 “땅을 팔아서 220억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미 박씨는 변심한 상태였다. “내 땅이나 마찬가진데, 내가 왜 땅을 팔아야 하느냐”고 맞섰던 것. 땅 다툼을 벌이던 중 이씨는 박씨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협박은 실행에 옮겨졌다. 이씨는 살인 청부업자 세 명을 고용했다. 한 명당 2억원씩 모두 6억원을 주기로 했다. 살해 대상은 박씨였다. 그때까지도 이재현 회장 등은 운전기사 대기실에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살인 청부업자들은 주유소에서 주유하고 나오는 박씨를 오토바이로 뒤쫓아가 멍키스패너로 머리를 내려쳤다. 청부업자들은 기절한 박씨를 산으로 끌고 갔고, 목과 얼굴만 남긴 채 땅에 묻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오갔다.

 

청부업자 “누가 널 죽여달라고 하더라.”

박씨 “누가 날 죽여달라고 했나?”

청부업자 “이○○이 죽여달라고 하더라.”

박씨 “얼마 받기로 했느냐?”

청부업자 “한 사람당 2억씩 6억 받기로 했다.”

박씨 “나를 좀 살려줘라. 그러면 20억 주겠다.”

청부업자 “너 돈 있느냐?”

박씨 “내 오피스텔에 있다.”

청부업자 “거짓말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박씨 “안다. 살려달라.”

 

박씨는 그날 살인 청부업자들과 함께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자신의 ㅅ오피스텔로 가서 그곳에 있던 현금 50억원 중 20억원을 청부업자들에게 주고 풀려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박씨는 이씨를 찾아가 “네가 나를 죽이려고 해? 네가 날 죽이려고 한 것은 경찰에 신고하고,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이 회장한테 말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만약 돈을 내놓으면 모든 걸 용서해주겠다”고 공갈쳤다. 당시 이씨는 자살까지 고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씨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때까지도 운전기사들이 모시는 ‘주군들’은 거의 매일 룸살롱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가 박씨를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결국 이씨는 박씨에게 300억원을 더 빼앗겼다. 사설 경마(220억원), 강화 일대 땅 매입(170억원), 청부 살인 무마 비용(300억원)까지 모두 합쳐 700억원 정도가 이 회장 비자금 통장에서 빠져나간 셈이다.

죽고 싶은 나날을 보내던 이씨는 결국 이재현 회장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실토하기에 이른다. 이 회장은 노발대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일을 계기로 서먹해진 이 회장과 신씨, 김씨 등 세 사람의 술 파티도 막을 내렸다.

살인 청부업자가 등장하는 영화 .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했다.
이재현 집사, 투자한 땅도 빼앗겨

분노하기는 신씨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이 신씨에게 박씨 문제로 크게 화를 냈던 것이다. 자신의 연예 사업 파트너로 관리해왔던 이 회장과의 관계도 한순간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신씨가 자신의 운전기사인 박씨를 납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신씨 “너 때문에 내 사업 다 망치게 됐어!”

박씨 “회장님, 죄송합니다.”

신씨 “(이 회장 운전기사 이씨로부터 받은 돈)

         300억 다시 돌려줘!”

박씨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씨는 박씨에게 300억원을 받아 이 회장에게 돌려줬다. 이 회장은 땅값으로 나간 돈(170억원)도 돌려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박씨가 땅 문제에 대해선 완강히 버텼다. 측근 명의로 된 땅값이 17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급등한 상태였다. 이 회장은 땅도 내놓으라고 신씨를 닦달했고, 신씨 역시 박씨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윽박질렀지만 박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땅은 내 땅이나 마찬가지다. 땅 못 준다. 내가 죽을 고비까지 넘겼는데…”라며 완강히 버텼던 것이다.

그러자 이 회장이 운전기사 이씨에게 “네가 알아서 (땅을) 갖고 와. 죽이든 살리든 네가 알아서 해. 너, (박씨를) 한번 죽이려고도 했잖아”라고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이때 이 발언으로 인해 이재현 회장의 살인 청부 의혹 사건이 불거진 것이다.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 회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인지, 이씨는 살인 청부업자를 동원해 또 박씨를 납치했다. 그런데 박씨는 이번에도 기적처럼 살아났다. 기절한 채 담요에 감겨 승용차 뒷좌석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그는, 의식이 깨어나 지방 국도에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박씨는 신씨에게 달려가 자신이 살해당할 뻔했던 일을 전했다. 그러자 신씨는 “나도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라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벼랑 끝에 몰린 박씨는 이재현 회장을 찾아가 “300억원까지 되돌려드렸는데, 회장님 집사(이씨)가 나를 또 죽이려고 했다”고 하소연했지만, 이 회장은 “너희 둘이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박씨는 자기 발로 검찰에 가서 “이재현 회장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 한 번은 이 회장 집사가, 또 한 번은 이 회장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살인 청부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이 회장 집사(이씨)가 이 회장의 비자금 관리 통장에 대해 다 안다”고도 진술했다. 자신의 병원 진단서까지 검찰에 제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게 해서 ‘이재현 회장의 살인 청부 사건’의 일부가 세상에 공개됐다. 더불어 이 회장의 비자금이 수천억 원에 달한다는 새로운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 회장과 호형호제하는 지인은 “검찰이 비자금 수사에 들어간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CJ측은 ‘의문의 자금’에 대해 “이 회장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공금이나 비자금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8년 12월, 검찰은 살인 청부 사건으로 이 회장의 운전기사 이씨를 구속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이 회장의 개인 자금에 관해 조사할 계획이 없다”며 수사를 덮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9년 12월 이씨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이 회장이 국세청에 1700억원대의 세금을 낸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한편 운전기사 박씨는 현재 서울 강남 지역 주먹계의 ‘큰 형님’으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고 지인이 전했다. 그는 강남 지역에서 고급 룸살롱 세 곳을 운영하며 ‘텐프로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1987년 11월23일 이병철 회장 장례식에 참석한 유족들. 왼쪽부터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우먼센스 제공
비운의 황태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굴곡진 삶의 궤적을 보면 꼭 들어맞는 수식어다. 이 회장은 1960년 3월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어머니는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의 딸인 손복남 CJ 고문이다.

이 회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의 불화로 13세 때부터 부친과 같이 살지 못했다. 그가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것도 아버지의 부재를 견뎌야 했던 성장 배경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이맹희 전 회장 또한 ‘비운의 황태자’였다. 원래 삼성 후계자로 점쳐졌으나 1970년대 초부터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등을 겪으며 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주와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삼성전자 부사장이었던 이 전 회장은 이후 그룹에서 쫓겨나, 삼성가와 인연을 끊고 사실상 가족과 별거하며 별도의 삶을 살았다.

이 전 회장은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이병철 창업주)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내가 여기저기 떠돌 때는 또 그대로 내 삶에 정신이 없어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애비였다’고 토로했다.

이재현 회장은 장충동 할아버지 집에서, 어머니 손복남씨와 함께 살았다. 장손인 그는 아버지와 소원해진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할아버지가 1987년 타계할 때는 물론이고 할머니 박두을 여사가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장충동 본가에서 지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장남인 이맹희 전 회장은 싫어했지만 장손인 이재현 회장에 대한 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일찍부터 할아버지를 이어 그룹을 경영할 재목으로 인식됐다. 이병철 회장은 대학 졸업 후 씨티은행에 입사한 손자 이재현을 제일제당에 오도록 해 경영 수업을 받게 했다.

삼성그룹의 후계자가 3남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으로 확정되면서 이재현 회장의 입지는 좁아졌다. 할아버지가 타계한 후 삼성전자 이사로 있던 그는 1993년 제일제당 계열 분리 결정과 함께 어머니인 손 고문으로부터 제일제당 주식을 증여받아 최대 주주가 됐다. 결국 계열사 하나를 받아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셈이다.

이 회장은 2002년 3월 제일제당 회장에 올랐다. 2002년 10월 삼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명까지 CJ로 바꿨다. 이 회장은 식품 서비스 사업을 하던 제일제당의 사업 분야를 엔터테인먼트·유통·물류 등으로 확장하면서 CJ를 재계 14위 대기업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재현 회장은 7월1일 횡령을 통한 거액의 비자금 조성, 배임, 탈세, 조세 포탈, 주가 조작 등의 혐의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서 독방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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