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이병철·정주영 시로 되살아나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05.2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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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협회, 근현대사 인물 112인 담은 시집 <사람> 펴내…찬양 일색 비판도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 112명이 시(詩)로 다시 살아났다. 한국시인협회(회장 신달자)는 최근 ‘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 <사람>(민음사)을 펴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망라됐다. 근대사 인물들의 빛과 그늘을 문학적인 관점에서 조명한 것이다. 올해 창립 56주년을 맞은 한국시인협회가 공동 집필한 시집이다.

독립운동가로는 김구 선생, 김좌진 장군,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등이 들어 있다. 정치인 중에서는 김대중·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을 찾아볼 수 있고, 경제인으로는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이 눈에 띈다.

김대건 신부·김수환 추기경·성철 스님 등 종교계 인물과 공옥진 여사, 김소월 시인, 윤동주 시인의 모습도 보인다. 대중에게 친숙한 코미디언 이주일, 비운의 복서 김득구, 박치기왕 김일,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 천안함 승무원 구조에 나섰다가 순직한 한주호 준위도 시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 시집의 최초 기획은 시인협회 회장단에서 나왔다. 김지헌 한국시인협회 사무국장은 “어느 날 회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우연히 말이 나와서 선정위원회를 만들었고, 몇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113명을 선정했다”고 전했다.

한 독자가 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 을 보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역사적 평가 엇갈리는 인물에 균형감 잃어

인물이 선정된 후에는 협회 회원 중 누가 시를 쓸지를 정했는데, 우선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평의원’들이 자신들이 쓸 인물을 골랐다. 그 다음에는 이사회에서 이사들이 인물을 선정했고, 나머지는 젊은 시인들 몫으로 돌아갔다.

김지헌 사무국장은 “거의 대부분 시인들 본인이 좋아하거나 평소 호감을 가졌던 인물을 중심으로 썼다”고 밝혔다. 이번 시집은 역사 인물을 시로 펴냈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옥에 티’가 있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과(過)’보다는 ‘공(功)’에 치우치면서 객관성과 균형감을 잃었다는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교육적 측면에서도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시인협회도 처음부터 해당 인물들의 ‘밝은 면’만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갖지 않았다. 저작에 참여한 시인들에게 인물들의 ‘공과(功過)’를 따져서 써달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점만 부각된 시집이 됐다. 처음 취지대로 집필이 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경우 시인협회 이사이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인 이길원 시인이 썼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광복 후 우리나라를 지켜낸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진보라는 가면을 쓴 붉은 얼굴들이 마음껏 설치는/ 넘치고 넘친 자유가 오히려 불안한/ 오늘’이라는 대목에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의 표현대로 라면 ‘진보=붉은 얼굴들(빨갱이)’로 볼 수 있어서다.

박정희 전 대통령 편은 이태수 시인협회 심의의원이 썼다. 이 심의위원의 시도 찬양 일색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다 비우는 청렴과 강직/ 오로지 국가 장래 생각뿐이었던 당신은/ 위대한 지도자요,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라고 썼다. 또 ‘5·16은 쿠데타로 잉태해 혁명으로/ 개발 독재는 애국 독재로 승화됐습니다’라는 대목에서는 군사정변으로 규정된 5·16을 애국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해석하고 있다.

‘누군가가 불가피한 시기에 불가피한 지도자가/ 불가피하게 독재를 했다고 간파했듯이/ 5·16 쿠데타와 유신 독재가 없었다면/ 민족중흥과 경제 발전은 과연 어떻게 됐을는지요’라며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유신 독재를 당연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누가 뭐래도 당신은 빛나는 전설, 꺼지지 않는 횃불입니다’로 찬양의 대미를 장식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록 놓고 갑론을박

작고한 대통령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도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포함시킬지를 두고 선정위원회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김지헌 시인협회 사무국장은 “인물 선정이 끝난 후 일부 젊은 시인과 일반인들이 ‘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없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우리가 보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굳이 노 전 대통령을 넣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도 다수 포함됐다.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활란,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방응모,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작곡가 홍난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남선 등도 미화돼 수록됐다.

시인협회 기획위원인 정영선 시인은 김성수를 일컬어 ‘당신이 겨레 속에 심은 씨앗이었습니다’라고 치켜세웠다. ‘방응모 편’을 작시한 홍사성 시인은 친일파로 등재된 그를 의식해서인지 ‘그래서입니다/ 굴욕의 시대 힘들게 살아간 사람에게 묵형 놓고/ 팔매질하는 일 턱밑에 송곳 괴고 되물어봐야 할 것이/ 그때 태어났다면 나는 어떠했을지 대답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는데, 이 대목은 친일을 할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육당 최남선은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낭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7년 조선총독부의 연구비와 생계 지원 유혹에 넘어가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친일 성향으로 바뀌었다. 1943년 재일 조선인 유학생의 학병 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기도 했다.

‘최남선 편’을 쓴 한영옥 시인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을 간과한 채 ‘15세의 나이에는 최연소 관비 유학생이 되어/ 현해탄을 오고 가면서 대양의 기개 높이 걸었네/ 우리 땅 앗아간 남의 나라에서 울분을 감추며/ 조국의 역사와 산하를 진한 울음으로 보듬었네’라고 썼다. ‘시’ 자체로만 보면 최남선은 천재 유학생이었고 애국자다.

반면 최문자 시인은 작곡가 ‘홍난파’에 대해 ‘출향에서 귀향까지 애국에서 친일까지’라며 친일파로 변절한 사실을 간접 언급했다.

“아차, 이태영 변호사가 빠졌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현대·삼성·LG·포스코 창업주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하나같이 기업보국(企業報國)을 일군 선각자로 묘사돼 있다. 이 중 ‘정주영 편’은 시인협회 고문인 황금찬 시인이 썼다. 황 시인은 정 전 회장을 ‘대한민국 경제대통령’으로 칭하며, 남북 민간 교류의 장을 트며 통일의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했다.

한국시인협회는 집필에 참여한 회원들의 시에 대해 일체 감수를 하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사람>이 이념적인 편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시집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다. 또 애국자도 있고, 친일 행적을 보였던 친일파도 있다.

그래서인지 신달자 시인협회 회장은 “사람이 곧 역사다. 이 시집은 ‘대한민국은 어떤 사람이 있게 만들었을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지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시인협회는 시집이 출간된 후 ‘아차!’ 하는 역사 인물이 있었다고 했다. 꼭 들어가야 할 한 사람이 빠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다. 김지헌 시인협회 사무국장은 “이태영 변호사가 빠진 것은 우리 불찰”이라며 못내 아쉬워했다. 


후손들이 낭송자로 나선다 

한국시인협회는 5월3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시집 <사람>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그런데 행사가 조금 독특하게 진행된다. 시집에 실린 인물들의 후손이나 관계 인사들이 직접 시를 낭송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시인협회에 따르면 낭송자로는 박태준 포스코그룹 명예회장의 아들인 박성빈씨, 박경리 소설가의 딸 김영주씨, 윤동주 시인의 조카 윤인석씨 등이 나온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에 대한 시는 손녀인 김을동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낭송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관련된 시는 작시자인 장석주 시인이 낭송자로 나선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수 편은 역도선수 장미란씨, 천안함 수색 중 순직한 한주호 준위에 관한 시는 부인 김말순씨가 낭송할 예정이다.

기자는 시인협회 관계자로부터 낭송자 섭외 과정에서 일어난 뒷이야기도 들었다. 조태열 외교부 제2차관이 <승무> <낙화> 등의 시로 유명한 고 조지훈 시인의 막내아들이다. 당초에는 조 차관이 아버지 조지훈 편을 낭독하기로 했다가 갑작스레 출장 일정이 생겨 빠지게 됐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도 할아버지 정주영 편의 낭송자로 흔쾌히 나섰다. 하지만 행사 당일 다른 일정이 잡히면서 불발됐다.

시인협회는 이번 행사를 위해 기업체에서 협찬을 받으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LG 등이다. <사람>에 수록된 창업주들과 관련된 기업이다. 이에 대해 시인협회측은 “협찬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원래는 문화부에 사업계획서를 냈는데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다. 그래서 신달자 회장님이 직접 나서서 협찬을 받았다. 큰돈은 아니고 5월30일 행사비에 쓰일 정도만 받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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