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신 간에 막히거나 거리 둬서는 안 돼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4.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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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① / 서총대에서 곡연 열어 시 짓고 술 마셔

명종은 문장을 곧잘 지었다. 유생들을 시험하는 책문을 스스로 짓기도 했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격려의 뜻으로 호초(후추의 한자어) 열 말을 내리면서 친서를 함께 보냈다.

문정왕후가 서거하자 제문을 친히 지었으며, 개성유수 진희복에게 개인적인 서찰을 내렸다. 명종도 다른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글로 정치를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위한 나이가 고작 12세였고, 한동안 대왕대비 문정왕후 윤씨(중종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니 말이다.

ⓒ 일러스트 유환영
인종도 명종도 신하와 글로써 소통 

인종은 왕비 박씨에게 후사가 없었고 후궁에게서도 자녀를 두지 못했다. 임종에 붓을 잡고 쓰려 했으나 쓰지 못하자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생각을 신하들에게 상세히 털어놓으려 해도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부왕의 상을 겪었거늘 상례도 마치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죽거든 부모의 능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 1545년 7월1일 인종은 경복궁 청연루에서 승하했고, 그해 10월 고양군 남쪽에 있는 정릉 곁에 안장되었다.

인종의 상례 때는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유관, 영중추부사 홍언필이 함께 원상(院相)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성복한 뒤에는 윤인경 등의 청에 따라 좌찬성 이언적, 우찬성 권벌 등까지 모두 원상으로 삼았다. 원상은 국상이 있고 새 왕이 상중에 있을 때 정무를 맡아 보는 중신들을 가리킨다.

이때 중종의 둘째 아들 경원대군이 인종 승하 후 6일째 되는 7월6일에 근정문에서 즉위했다. 이 사람이 바로 명종이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성종 때 고사에 따라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기로 했다. 당시 정부가 명종에게 국왕으로서 경계할 일 10개 조목을 진달했는데 그 첫 번째가 ‘자전께서는 문왕 어머니와 맹자 어머니의 자애를 체득하셔서 성상의 자질을 잘 인도하셔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을 정당화한 것이다.

명종은 즉위 후 작은외삼촌 윤원로를 해남으로 유배 보냈다. 윤원로는 윤원형의 동생이다. 인종이 춘궁(동궁)에 있을 때 명종과의 우애를 이간하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대왕대비의 뜻을 따랐을 것이고 스스로 안출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명종은 생각보다 매서운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명종은 재위 15년(1560년) 9월19일에 서총대에서 곡연(曲宴)을 베풀었다. 서총대는 연산군 때 창경궁에 쌓은 석대로 영화당 동남쪽, 지금의 춘당대 동편에 있었다.

본래 성종 때 파가 창경궁 후원에서 났는데 한 줄기에 9개의 가지가 자라니, 당시 그것을 두고 서총(瑞?)이라고 했다. 그 후 연산군 때 이곳에 대를 짓고 서총대라 이름 지어 방탕하게 놀이하는 장소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명종 이후로 조선의 역대 군주들은 이곳에서 친히 활을 쏘고 문신의 문장과 무신의 무술을 시험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곡연이란, 국왕이 궁중의 금원(비원)에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베풀던 사사로운 연회를 말한다. 규모가 작은 것이 보통이지만 매우 성대한 것도 있었다. 명종 때의 서총대 곡연은 규모가 매우 컸다.

이날 명종은 율시로 지은 어제(御題)를 내리고 좌우에게 화운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또 무신에게는 과녁을 쏘게 해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그러고서 좌우에 명해 국화를 머리에 꽂게 하고, 술 잘 마시는 몇 사람에게는 특별히 큰 잔으로 마시게 했다.

그리고 술을 종자기에다 따르게 해 좌의정 이준경에게 권하도록 명하고, “경이 지난해 취로정 연회에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으므로 경에게 벌주를 내린다”고 했다. 저녁이 되어 신하들은 모두 궁궐의 촛불을 하사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훗날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곡연은 국왕이 사사롭게 신하들을 위해 베푼 것이므로 대간까지 참여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국왕이 시를 지어 군신과 즐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인지 당시 명종이 지은 율시를 실록에 싣지 않았다. 영의정 상진(尙震)은 그 다음 날 국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은전의 글을 올렸다. 명종은 그 사은전을 받아보고 “군주와 신하의 사이는 막히거나 거리를 두어서는 안 되오. 공경 벼슬과 시종 신하들은 예법에 따라 마땅히 후하게 대접해야 할 것이오. 사은하지 않도록 하오”라고 비답을 내렸다.

명종 15년 서총대의 곡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시의 성사를 그림으로 그려 보관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성군과 명신이 만나는 성대한 일이요, 감동해 군주를 추대함이 기쁜 일이므로 반드시 도화에 옮겨 그린 뒤에야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일을 예조에 부탁해서 명종 19년(1564년)에 비로소 화축을 표구했다. 이 그림은 <서총대인견도> 혹은 <서총대친림사연도> <서총대시연도>라고 하는데, 여러 벌의 그림이 국내외 박물관에 전한다. 애당초 여러 벌을 그렸을 뿐 아니라 후대에 거듭 모본이 만들어져서 이제는 어느 것이 진본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서총대인견도>에는 명종 19년(1564년)에 홍섬이 서문을 적었다.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된 <의령 남씨 전가경완도(傳家敬翫圖)>에는 채색 궁중 행사도가 들어 있는데, 거기에 명종이 서총대에서 문무 시예를 시행한 날 남응운이 글짓기와 활쏘기에서 모두 으뜸으로 뽑혀 말 두 필을 상으로 하사받은 고사를 그린 그림이 있다. 서총대 위에는 초승달 모양의 차일을 설치했고 어좌를 중심으로 관원들이 열 지어 있다. 화면 중앙에 흰 말과 검은 말을 하사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홍익대 박물관에도 같은 소재의 그림이 있다.

시제 내리고 좌중에 시 짓게 한 까닭

명종이 재위 15년에 서총대 친림사연에서 어필로 시제를 내려주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라 한 것은 그 무렵 시에 자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명종은 정치적 리더십을 거듭 시험당했고, 번번이 시험을 잘 치르지 못했다. 문정왕후의 수렴정치가 끝난 것이 명종 8년(1553년). 하지만 1555년에는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오던 왜인이 60여 척의 배로 전라도에 침입해 영암·장흥·진도 등을 유린하는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또 1559년에서 1562년 사이에는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탐관오리를 죽이는 등 횡행했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명종은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총대에서 곡연을 벌인 것이리라. 홍섬은 <서총대인견도서>에서 명종의 업적을 칭송해 이렇게 말했다.

 

아아, 우리 주상전하는 나라 다스리는 일에 근실하시길 10년 하고도 여섯 해나 해서, 조정이나 재야가 모두 안녕하고 평온해, 때때로 여가와 일예(逸豫)가 많으셨다. 마침내 경신년 9월19일에 장막을 창덕궁 서총대에 설치하시니, 금원이 새벽에 열리고 옥로가 땅의 먼지를 촉촉이 적실 정도였다.

 

조금 간지럽다. 20대 후반의 젊은 명종은 글로 정치를 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훈련을 다지기는 했다. 하지만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만큼 제왕학을 익혔다고는 할 수 없다.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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