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이정희는 치열했으나 지금은 스펙 쌓기도 벅차니…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04.1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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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서 사라지는 총여학생회…숭실대·연대·한양대 등 명맥만 유지

봄이 오는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서는 학생들의 열띤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학내 여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총여학생회(이하 총여)의 존폐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서다. 그동안 총여는 여학생들의 복지와 보호받아야 할 권리를 챙겨왔다. 지금은 대학 내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1980년대 총여는 대학 내 여학생의 권익 향상을 위해 발로 뛰었다. 당시 총여학생회장은 남성이 많은 대학 안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총여를 이끌었고, 여성 불평등 문제를 사회 문제로 확장하는 데 기여해 주목받았다. 1980년대 총여학생회장 출신으로는 심상정 의원과 이정희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총여는 여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하면서도 사회운동에서도 활동 범위를 넓혀 한국 사회 속 여성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운동권이 대학 내에서 급속히 세력을 잃으면서 총여 또한 큰 변화를 겪었다.

4월9일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는 연세대 총여학생회실(왼쪽). 오른쪽은 현판이 뜯겨나간 채 출입문이 잠겨 있는 성균관대 총여학생회실. ⓒ 시사저널 전영기
서울 소재 대학 중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

숭실대학교 학내 신문 <숭대시보> 조사에 따르면 서울 소재 대학 중 총여가 남아 있는 곳은 숭실대, 연세대, 한양대, 홍익대 정도다. 그 밖의 대학에서는 기구는 있어도 회장을 선출하지 못해 집행부를 꾸리지 못하거나 아예 폐지했다. 총여 선거에 나서는 후보가 없거나 몇 년째 투표율 미달로 회장을 뽑지 못했기 때문이다.

3월26일 열린 건국대 전체학생대표자회의는 투표를 통해 찬성 84표, 반대 18표로 총여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총학 산하 ‘성평등위원회’에서 총여 업무를 대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경희대 서울캠퍼스에서도 총여 보궐 선거가 무산되자 학내 신문 <대학주보>가 학생들의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남학생 81.2%가 폐지를 원한 반면, 여학생 68%는 유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여학생들은 총여의 유지를 바라면서도 선거에는 관심이 없는 이중성을 보였다. 폐지를 원하는 이유로는 ‘총학이 할 수 있는 일’ ‘남녀 불평등 개선’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동안 총여는 대학 내 별도 기구로서 여학생들의 복지 문제를 필두로 여성주의 문화제, 성폭력·성희롱 예방 교육 등의 사업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전국을 통틀어 몇 곳의 총여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연덕원 한국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총여 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학생회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이 얼마나 되겠나.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취업에 관심이 몰리는 사이 학생회와 학생들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운동권이냐 아니냐를 두고 원인을 찾기도 했는데 이제는 새로운 측면에서 학생회의 역할을 고민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총여는 왜 학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을까. 기자는 4월8일과 9일 이틀 동안 서울 시내 대학 몇 곳을 찾아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다수 학교에서 총여의 존재를 찾을 수 없었다. 몇 년째 명목상 기구로 남아 있는 대학들에서는 총여학생회실을 없애기도 했다.

캠퍼스 내 학생들을 붙잡고 물었다. 남학생들에게 질문했더니 대학 내 성 평등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총여가 존재하는 것은 역차별이라거나 총학이 있는데 총여가 왜 필요하냐는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여학생들은 대통령이 여성이라고 해서 성 평등이 이루어진 세상도 아니라며, 사회적 약자라고 할 여학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그런 여학생들조차 총여의 활동에는 관심을 갖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비교적 운영이 잘 되고 있다는 연세대 윤소영(식품영양학 4년) 총여학생회 회장은 “총학과 별도로 총여가 단독 기구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데 다들 공감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궁경부암 예방 접종 문제나 캠퍼스 내 성폭행 문제 등에서는 다른 기구가 잘 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총여의 존립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성 평등 문제가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인 것처럼 총여가 여학생만을 위한 기구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말도 했다. 또 총학 등 다른 기구에 종속되면 총여만의 사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없는 등 문제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런 총여의 지속성과 명확성을 강조한 결과 윤 회장은 투표율 57%에 68%의 지지를 얻어 당선했다. 그는 다른 대학에서 총여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여학생들이 관심을 갖게 만드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학생들 사이에 총여를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됐을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총여 사라진 건 여권 신장 때문 아니다

성균관대에서는 총여가 명목상 존재했지만, 지난 5년 동안 회장을 선출하지 못해 집행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4년간 투표율이 미달했고, 올해는 후보조차 나오지 않았다. 총여학생회실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현판마저 뜯겨나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여학생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민석 총학생회장은 “총여가 본연의 일을 하지 않았기에 여학우들에게서 신뢰를 잃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김 회장은 “총여가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기도 했다. 총학에서 총여 본연의 업무를 위임받아 하고 싶은데 명목상 기구가 남아 있어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혹시 운동권·비운동권의 차이 같은 것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요즘 대학에서 그런 분류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총여를 꾸려서 이익을 챙길 욕심을 버리고 여학우들의 공감을 얻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1년 중앙대 총여학생회장 출신으로 현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는 백시진씨는 “아직도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는 대학 사회에서 총여가 여학우들의 근질근질한 데를 잘 찾아서 일해야 하는데…”라며 중앙대 총여 또한 지난해부터 집행부를 꾸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대학 내에서 총여가 존립할 수 있으려면 여학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사업을 추진하거나 여학생들 간에 정서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시급해 보였다. 그런데 캠퍼스 분위기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등 각자 당면한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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