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시대에는 구관이 명관?
  • 정일환│뉴시스 기자 ()
  • 승인 2013.02.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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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업계 올드보이들 귀환 잇따라

원명수 전 메리츠화재보험 대표이사 부회장이 메리츠금융지주 부회장으로 복귀한다. 2010년 메리츠화재 부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3년 만의 금의환향이다. 현대해상화재에서 ‘레전드(Legend)’로 불리던 이철영 사장도 3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너가 있는 대기업에서 전문경영인의 컴백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다. 이는 ‘사상 최악’이라는 보험업계의 위기 상황과 관련이 있다. 위기가 닥치자 보험사들이 구원투수로 ‘검증된 구관(舊官)’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난국 돌파를 위해서는 관리형 CEO보다는 강한 추진력과 영업력을 갖춘 야전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메리츠금융지주는 2월4일 이사회를 열고 원명수 전 부회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하기로 했다. 원부회장은 주주총회를 거친 뒤 오는 4월부터 메리츠금융지주 부회장을 맡을 예정이다.

(왼쪽부터) ⓒ 뉴스뱅크, ⓒ 연합뉴스, ⓒ 뉴스뱅크
야전형 CEO 컴백을 부른 위기 도래

원부회장은 메리츠화재의 전성기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1947년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델라웨어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스쿨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한빛은행 상무이사, 서울은행 부행장을 거친 뒤 삼성화재 전무를 맡으면서 보험업에 투신했다. 이후 PCA생명 전무를 거쳐 메리츠로 옮겨왔다.

보험업계는 원부회장이 2005년 동양화재를 메리츠화재로 재탄생시킨 것은 물론, 2011년 닻을 올린 메리츠금융지주의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메리츠금융그룹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한다.

동양화재 시절부터 메리츠화재를 이끌었던 원부회장은 사명을 변경하고 이미지를 쇄신하는 ‘제2의 창사’ 프로젝트를 맡아 업계 하위권이던 메리츠를 5위권으로 끌어올린 장수 CEO이다.

그는 2005년 사명 변경 이후 철저한 수익성 위주의 성장 전략을 구사하며 5년여 만에 매출 2배, 이익 규모 6배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다. 덕분에 2005년 당시 2천원에 못 미치는 수준이던 주가가 5년여 만에 10배로 뛰어오르며 주주와 임직원 모두가 돈벼락을 맞기도 했다.

물론 좌절도 있었다. 제일화재 인수 실패, RG(선수금환급보증보험) 사태 등에 이어 2010년에는 실손의료보험 중복 판매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옷을 벗는 상황까지 맞아야 했다. 원부회장은 이 일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은 뒤 메리츠화재를 떠나야 했다.

그 후에는 계열사인 메리츠금융정보서비스와 메리츠비즈니스 이사로 몸을 낮춘 채 3년간의 재선임 금지 기간을 채우며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냈다. 보험업법상 문책 경고를 받은 임원은 3년간 재선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메리츠금융지주는 지난해 3월 출범한 국내 최초의 보험지주회사이다. 메리츠화재, 메리츠종합금융증권, 메리츠자산운용, 메리츠금융정보서비스, 리츠파트너스, 메리츠비즈니스서비스 등 6개 자회사와 4개 손자회사 등 총 10개의 계열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한진그룹 고 조중훈 회장의 4남인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은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종합금융증권 회장을 맡고 있다.

지주사의 기둥인 메리츠화재는 1922년 조선화재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손해보험회사이다. 손보업계에서는 ‘조상님’으로 불릴 만큼 긴 역사를 지닌 회사로, 올해 창립 90주년을 맞아 재도약을 노리고 있다. 원부회장은 컴백하면서 지주사 CEO로 직급이 더 높아졌다.

현대해상화재는 ‘'레전드(Legend)’로 불리는 이철영 사장을 컴백시켰다. 현대해상은 2월4일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해 임기 만료로 물러난 서태창 대표의 후임으로 이철영 전 사장과 박찬종 부사장을 공동대표로 선임했다. 공교롭게도 메리츠화재의 원부회장이 이사로 복귀하던 날 이철영 사장 역시 친정에 돌아왔다.

오너가 아님에도 부활한 이유

이사장의 귀환은 여러 면에서 보험업계의 관심을 모은다. 우선 이사장은 한 차례 물러났던 대표이사가 3년 만에 같은 자리로 돌아온 보기 드문 사례이다. 현대해상이 이사장의 복귀와 동시에 3년 전 폐지했던 공동대표제를 부활시켰다는 점도 주목된다. 현대해상은 이철영 사장이 처음 대표이사에 올랐던 2007년 2월 서태창 전 사장에게 공동대표를 맡겨 ‘견제와 균형’을 추구했다. 이후 2010년 2월 이사장이 5개 자회사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자 공동대표제 역시 용도 폐기한 바 있다.

이철영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1986년 현대해상으로 옮겨온 ‘현대맨’ 출신이다. 자동차보험본부, 재경본부, 경영기획부문을 거친 뒤 2007년부터 3년간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는 현대C&R 등 현대해상 5개 자회사의 이사회 의장직을 수행해왔다. 현대건설 시절의 10년을 빼고도 무려 28년간이나 현대해상에만 출근한 ‘토박이’인 셈이다. 그는 오너인 정몽윤 회장이 현대종합상사에서 현대해상으로 옮겨온 이듬해부터 함께 호흡을 맞춰왔다. 이철영 사장의 좌우명은 ‘하면 된다’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대표 어록인 “해보긴 했어?”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현대그룹형 마인드이다. 특히 그는 정몽윤 회장이 불미스런 일로 퇴진한 뒤 발생한 장기간의 경영권 공백을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만드는 등 위기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신임을 얻었다.

정회장은 지난 1996년 9월 분식회계 혐의로 금융 당국의 해임 권고를 받고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뒤 2004년 11월 복귀할 때까지 8년간이나 자리를 비웠다. 현대해상은 오너 부재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던 업계의 예상을 뒤엎고 오히려 확고한 업계 2위로 도약했다.

저금리 위기도 돌파할까

1995년 자산 규모 1조원에 불과하던 현대해상은 2004년에는 자산 규모가 6배로 늘어났고, 2009년에는 10조원을 돌파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또 국내외 10개 계열회사의 성장과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 등 주변의 우려가 무색할 만한 성적을 냈다.

이런 점에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7남인 정몽윤 회장이 지금의 위기 상황 돌파를 위해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이사장과 함께 이번에 공동대표에 선임된 박찬종 부사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를 거쳐 2003년 현대해상에 합류해 기업보험부문과 경영지원부문을 맡아왔다. 이철영 사장은 회사 전체 업무를 총괄하며, 박찬종 부사장은 기업보험부문과 경영지원부문을 맡게 된다.

업계에서는 푸르덴셜생명의 황우진 전 사장이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도 들린다. 황 전 사장은 지난 2005년 한국 푸르덴셜 사장에 올라 회사를 이끌다 지난 2010년 푸르덴셜그룹 남미 사업 총괄을 맡으면서 해외로 떠난 바 있다.

최근 보험업계 일각에서 그가 ‘남미 지역에서 거둔 실적을 바탕으로 한국 복귀를 지원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소식은 올해 손병옥 현 푸르덴셜 사장의 임기가 만료된다는 사실과 맞물리면서 황 전 사장의 복귀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이에 대해 푸르덴셜생명 관계자는 “황 전 사장이 최근 개인적인 일로 한국을 방문했지만 한국 푸르덴셜 복귀와는 무관하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복귀설은 전혀 사실무근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보험업계에서는 성장기를 이끈 CEO들에 대한 오너의 신뢰와 업계의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메리츠와 현대해상의 경우 오너 체제가 확고한 회사이다. 보험 산업의 붐업(Boom Up)을 주도한 인물을 재기용해 위기를 타파하려는 오너들의 의지와 신뢰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최악의 경영 위기…저금리발 구조조정 임박  

저금리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보험사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보험사는 고객에게 지급할 보험금을 준비하기 위해 주로 국채 등 리스크가 작은 자산에 장기 투자하는데, 최근 금리가 떨어지면서 자산 운용 수익률이 낮아져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주요 보험사들은 최근 1년 사이 자산 운용 수익률이 1% 이상 떨어졌다. 그나마도 돈을 굴릴 마땅한 운용처가 없어 대안 모색에 머리를 싸매고 있다.

나란히 생·손보업계 선두를 달리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경우 최근 자체 경영 진단까지 실시하며 위기 탈출을 위한 묘안을 짜내고 있다.

보험사 경영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저금리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두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해 기준금리가 2.75%로 떨어지면서 보험사의 자산 운용 이익률은 4%대로 주저앉아 있다. 특히 국내사보다 더 안전 위주로 자산을 운용하는 외국계 생명보험사의 경우 4%마저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자산 운용을 통해 수익을 내지 못하면 보험사는 공시 이율을 낮출 수밖에 없다. 공시 이율은 쉽게 말해 보험사가 저축성 보험 등에 가입한 고객에게 지급하는 이자율로, 현재 보험사의 공시 이율은 4%로 떨어져 있다.

그나마 공시 이율 조정이 가능한 상품은 금리 변동형 상품에 국한된다. 고정 금리 격인 확정형 상품은 보험사의 자산 운용 수익률이 아무리 낮아져도 가입 시에 약정한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이른바 ‘역마진’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생명보험사의 금리 확정형 상품 비중은 50~60% 수준에 육박한다. 이들은 대부분 5~6%대의 고금리 상품인 데다 가입 기간이 20~30년인 장기 보험이다.

현재의 저금리가 계속된다면 보험사들은 수십 년간 ‘손해 나는 장사’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폭탄을 안고 있는 셈이다.

생보사들보다는 금리 연동형 상품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 손해보험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금리가 떨어져도 일정 이율을 보장해주는 최저 보증 이율 수준을 높게 설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험업계에서는 최악의 경우 일본처럼 보험사가 줄도산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저금리 시대가 보험사 구조조정을 부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 대형 생보사 관계자는 “저금리 기조가 예고되면서 보험사들이 수년 전부터 자산 포트폴리오 조정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부동산과 주식 등 투자 자산 가격 하락과 저금리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위험한 상황이 닥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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