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들과 예술적 취향까지 공유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1.0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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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⑤ / ‘소상팔경도’를 보고 <소상팔경> 지어

성종은 선비들을 우대해 그 뜻을 길러준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성호 이익은 조선 시대의 군주 가운데 아래 신하들을 접견하여 정책에 반영한 군주의 예로 성종을 들었다. 곧, 성종 때는 여러 관료를 자주 접견해 만약 사리에 맞는 말이 있으면 그 말이 낭료(정5품 이하의 당하관)에게서 나왔는지 아닌지 물어서, 만일 낭료에게서 나왔으면 그 사람을 불러 거듭 물어본 다음 그를 발탁해 승진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성종은 문인들을 아껴, 심지어는 상식을 벗어난 발탁을 했다고 한다.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는 충주의 한 향교 선생을 홍문관에 등용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성종 때 한 환관이 왕명을 받들어 호서 지방을 암행하고 와서, 충주에 사는 한 가난한 선비의 일을 이야기했다. 한 선비가 목사의 손님이 되었는데, 목사는 그를 위해 기생을 시켜 하룻밤 모시게 했다. 선비는 정이 깊어져서 이별할 때 눈물을 흘렸다. 향교 선생이 그를 대신해 이별의 율시를 지어 주었는데, 두 번째 연(함련)은 ‘붉은 빛 높은 띠는 허리에 비껴 가늘고, 검은 빛 큰 신은 발에 신어 편안하네(紫芝崔帶橫腰細, 黑黍張靴着足安)’였다. 성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향교 선생의 이름을 기둥에 적어두었다가, 홍문관원의 후보자 명단인 홍문록을 작성할 때 그 이름을 올리게 했다.

태수에게 사간원 집의 벼슬 → 이조판서까지

또 성종은, 어떤 태수가 아주 유용한 그릇이라는 말을 듣고 사간원 집의 벼슬을 주었다. 삼사가 안 된다고 하자, 며칠 안 되어 또 이조참의로 삼았다. 삼사가 간쟁하자, 다시 이조참판으로 삼았고, 삼사가 다시 간쟁하자 이조판서로 삼았다. 삼사가 할 수 없이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종은 어제시를 내리고 신하들이나 종실에게 차운하게 하여, 정신적·미학적 교감을 유도했다. 앞서 성종이 <비해당사십팔영>을 짓고 호당(독서당) 학사들에게도 차운하게 했다고 쓴 바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풍경을 복수의 프레임으로 짜서 그 각각의 미적 특성을 극대화시켜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시로 읊는 방법이 발달했다. 즉, 하나의 공간을 사경, 팔경, 십경, 십이경, 사십팔경 등으로 구획해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노래하는 방식이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팔경시와 팔경도이다. 당나라 말 오대와 송나라 때 화가들이 중국 호남(湖南·후난) 성 소수와 상강이 만나는 동정호 주변의 절경을 8폭에 묘사한 소상팔경도를 제작했다. 산시청람(山市晴嵐), 어촌석조(漁村夕照), 소상야우(瀟湘夜雨), 원포귀범(遠浦歸帆), 연사만종(烟寺晩鐘), 동정추월(洞庭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모설(江天暮雪)이 각각의 소제목이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는 소상팔경을 시로 읊는 일도 유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중국 그림이 수입되어 유포되었다. 그리고 영감을 토대로 팔경의 구도를 나름으로 재편성한 독자적인 소상팔경도도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전문화가나 문인화가가 소상팔경도를 많이 그렸다. 고려 말부터는 소상풍경을 여덟 수의 시로 노래하는 방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성종은 소상팔경도에 근거하는 <소상팔경>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형 월산대군의 <금중잡영> 8수에 차운하고 스스로 금중팔영시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신하들에게 보여주고 차운하게 했다.

안견의 ‘소상팔경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왕의 시로는 너무나 섬세한 묘사

성종의 소상팔경은 <열성어제>에 실려 있다. 성종보다 앞서 안평대군은 화가 안견에게 소상팔경도를 그림으로 그리게 한 후, 소상팔경 시를 짓고 문신들에게 차운하게 했다. 성종도 그렇게 했을 듯하다. 성종은 소상팔경을 두고 오언율시 2수씩 모두 16수를 지었다. 소상팔경의 첫 주제 <산시청람>을 노래한 2수 가운데 첫 수는 이러하다.

 

곱디곱게 산에 비췻빛 비끼고

부슬부슬 비가 걷히기 시작할 때

흰 비단(구름)이 살짝 가렸다간 걷히자

바위의 나무들은 꽃들이

돌연 선명하다

햇빛 엷어서 앞마을은

그림자에 덮이고 

시내 소리 시끄러우니

어디에서 소리 나나

숲 건너에 집이 있는 줄 알겠나니

닭들이 정오 무렵 울기 시작하누나

 

宛轉山橫翠(완전산횡취)

微雨弄晴(비미우농청)

羅紈輕掩暎(나환경엄영)

巖樹乍分明(암수사분명)

日薄前村影(일박전촌영)

溪喧何處聲(계훤하처성)

隔林知有屋(격림지유옥)

鷄午時鳴(계진오시명)

 

제왕의 시라 하기에는 묘사가 너무 섬세하다. 그림 속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그 풍경에서 빛깔과 소리를 읽어낸 것이다. 본래 오언율시는 소박하면서 큰 지향을 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성종은 그 형식을 이용해 미세한 감성을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구름을 흰 비단이라고 표현하는 등 비유어도 감각적이다.

뒷날 인조는 공신 여덟 사람에게 성종의 소상팔경시에 대해 각각 2편의 시를 차운하게 했다. 그리고 화가 이징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그것들을 모아 거대한 시화첩을 만들게 했다. 문장가 장유가 <성묘어제소상팔영첩서(成廟御製瀟湘八詠帖序)>를 지었다.

월산대군은 금중잡영시 8수를 지어 성종에게 바쳤다. 소제목은 <인정전후자미(仁政殿後紫薇)> <어구양류(御溝楊柳)> <긍괴(宮槐)> <우청(雨晴)> <관어제시(觀御製詩)> <관어필화(觀御筆書)> <금중문선(禁中聞蟬)> <금중만출(禁中晩出)> 등이다. 앞의 네 수는 궁중의 장미꽃, 버드나무, 괴나무, 갠 하늘을 소재로 삼았고, 뒤의 네 수는 국왕이 시 짓는 모습, 글씨 쓰는 모습, 매미 소리 듣는 모습, 저녁 경치 즐기러 나가는 모습 등을 소재로 했다. 성종도 궁중팔영시를 지었다. 이 시는 전하지 않지만 성종의 당숙인 부림군 이식이 차운한 것이 남아 있다. 그 팔영은 <금어청운(禁?晴雲)> <어구유수(御溝流水)> <용류야월(龍樓夜月)> <봉궐신종(鳳闕晨鍾)> <금전낙화(金殿落花)> <옥계방초(玉階芳草)> <궁문화루(宮門畵漏)> <연로춘풍(輦路春風)> 등이다.

예술적 취향이 남달랐던 성종은 그 취향을 신하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경물을 복수의 프레임으로 짜 각각을 노래하고 신하들에게 창화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근엄한 유학자 문신들은 성종에게 그 취향을 억제하라고 간했지만, 과연 그 우아한 취향을 탓해야 했을까?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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