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소리에 약해지지 말고 매의 비상을 닮으라”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2.31 16: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종 ④ / 형 월산대군에게 매 한 마리와 함께 시 선물

박용순 한국전통매사냥보존회장의 ‘매사냥 시연회’. ⓒ 연합뉴스
성종은 월산대군에게 매 한 마리를 하사하고 시를 적어 주었다. <열성어제>에 ‘매 한 마리를 하사하고 함께 시를 내린다. 사례 하지 마라(賜鷹一連幷詩勿謝)’라는 시가 실려 전한다.

내가 푸른 매를 얻었는데

털과 뼈가 모두 맑도다

한 번 날매 일천 들판의

뭇 새들이 놀라네

깍지에서 만 리 멀리 가려는

마음이 먼저 발하고

부르면 다재다능한 기세를

스스로 바치네

갑자기 생각하니,

형님께서는 별장을 열어두어

비단 꿩이 보내는

봄 소리를 즐기시겠지

가녀린 가랑비가

개고 꽃이 환히 핀 날

내가 선물을 가려 보내는

뜻을 잊지 마소서

 

我得蒼鷹毛骨淸(아득창응모골청)

一飛千野衆禽驚(일비천야중금경)

邊萬里心先發(구변만리심선발)

呼處多能氣自呈(호처다능기자정)

却憶尊兄開別墅(각억존형개별서)

深知錦雉送春聲(심지금치송춘성)

纖纖雨霽花明日(섬섬우제화명일)

應不忘吾選情(응불망오선황정)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매를 사육하고 사냥을 맡은 응방을 궁궐과 전국 각지에 두었다. 응방 제도는 몽고에서 들어온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고려 충렬왕 원년 1275년에 처음 설치했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후반까지 고려 상류층 사이에서는 매사냥이 성행했다. 매사냥 인구가 늘어나다 보니 길들인 매를 도둑맞는 일이 잦아졌다. 매의 소유주를 표시해 매에게 붙여둔 ‘시치미’를 떼어버리면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데서 ‘시치미를 뗀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의 응방은 면역과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많은 전답을 하사받았고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그래서 충선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폐지와 설치를 반복하다가 창왕 때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1395년(태조 4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1473년(성종 4년)에는 응방을 혁파했으나, 성종은 여전히 매사냥을 즐겼던 듯하다. 연산군 때 이르러 좌우 응방이 다시 설치되었고, 1715년(숙종 41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고려 충혜왕은 생닭을 매에게 주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일시 폐지했다고 한다. 이첨(李詹, 1345~1405년)이 <응계설(鷹鷄說)>을 지어 그 사실을 이렇게 논했다.

 

영릉 때는 응방에 예속된 아전이 닭을 매의 먹이로 주었다. 매가 닭의 날갯죽지 한쪽을 거의 다 먹어서 죽을 지경에 있는 닭을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더니, 닭이 아침에 이르자 역시 울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임금이 측은히 여겼다. 그 후 조정에서 논의하여 이를 폐지했다. 새벽에 닭이 우는 것은 천성이 그러한 것이기에, 사람이 들을 때는 덤덤하게 여긴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닭이 한번 울자 임금이 감동하고 나라에서 기관을 폐지하였으니, 이 사실은 인(仁)이 본래 인심에 고유함을 알게 한다. 당시 사람이 매에게 사역되었는데, 높은 산에 서식하는 매는 사람을 만나면 절름발이가 되게 하고, 바다에 서식하는 매는 배를 침몰시켜 사람을 익사하게 하였다. 그물 치는 일이 일어나더니 팔찌와 깍지의 설비가 잇따라 일어났다. 집집마다 길러서 먹이를 주자, 밭의 곡식을 짓밟았다. 매의 불편함을 말하는 사람들이 어찌 닭 한 마리의 울음 소리에 그칠 뿐이었던가.

이첨은 매 기르는 일을 거론함으로써, 군주가 자신의 기호 때문에 백성들을 고통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했다.


고려 때부터 매의 본성, 길들이는 법 기록

한편, 조선 후기의 강재항(1689~1756년)은 <양응자설(養鷹者說)>을 지어, 매의 본성을 파악해 길들이는 법을 논했다.

 

매는 맹금류입니다. 장백의 산에서 태어나 덕림의 벼랑에서 자라서, 넓은 바다의 가에서 날고 짙은 하늘 바깥에서 날아다닙니다. 매는 산림에 서식하려는 본성과 하늘로 솟아오르려는 의지를 지녀 옹졸한 닭이나 오리처럼 기르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짐승 잡는 그물을 쳐서 그물코를 빽빽이 해서 매가 걸리면 그 몸을 묶어서 가죽 팔찌에서 먹입니다. 낮에는 팔뚝 위에서 기르고 밤에는 등불 밑에서 기르면서, 가까이는 노끈으로 시험해보고 멀리는 휘파람 소리로 시험해봅니다. 코끼리와 사슴을 새긴 쇠방울 장식으로 겉을 꾸며주고 쥐·비둘기·닭·참새 따위 먹을 것으로 속을 채워 줍니다. 물에 젖게도 하고 굶기기도 하고 목마르게도 하고 길들여서 화합하게 하고 날게 하여 익숙해지게 하고 주물러 순하게 합니다. 산림에 서식하려는 본성을 막고 사람에게 길러지는 것을 즐기게 하며 하늘로 솟구치려는 것을 잊게 하고 사람의 손에 익숙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30일이 지나면 친해지고 50일이 지나면 스스럼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본성은 산림을 향하고 그 의지는 하늘에 있어서 마음에 감응하는 바가 있으면 길러진 바를 돌아보지 않고, 기운에 솟아나는 바가 있으면 익혀왔던 바를 생각지 않습니다. 바람이라는 것은 만물을 움직이는 것인데, 새는 바람을 좋아합니다. 매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날아서 바람을 만나면 그 기운이 방양해져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한 번 날면 흡족하고 두 번 날면 자유자재하게 되며 세 번 날면 구름과 연기를 가르고 하늘을 넘어 표연히 달아나 간 곳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창밑에 장목기를 세워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장목기를 보고 바람이 일면 매를 날리지 않습니다. 저녁은 만물이 슬퍼하는 바이고, 산림은 새가 돌아가는 장소입니다. 해가 산 밑으로 들어가 어두워지면 온갖 새들이 숲에 의탁하여 짝들이 서로 부르는데, 암수가 서로 응수하여 화합하는 소리가 위아래서 들리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리가 나게 되면, 매가 그 소리를 듣고 정이 감응하여 방황하고 주저하며 동쪽을 돌아보고 서쪽을 바라보다가는 종당에는 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산 위에서 해를 보다가 해가 지려 하면 매를 날리지 않습니다.

 

강재항은, 매 기르는 법을 거론해 사람마다 선의 본성을 잘 길러야 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성종이 매를 월산대군에게 보내면서 함께 적어 보낸 시에서 말하고자 한 뜻은, 이첨이나 강재항의 글과는 취향이 전혀 다르다. 성종은 월산대군에게, 봄 꿩의 소리에 귀 기울여 마음을 유약하게 갖지 말고 뭇 새들을 놀라게 하는 매의 비상을 닮으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월산대군은 매의 비상을 꿈꿀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할 것은 ‘무심한 달빛’뿐이었고, 그에게 허여된 것은 ‘빈 배’뿐이었다. 성종이 그에게 보낸 매는 그의 좌절을 더욱 자각하게 하는 잔인한 선물이었다.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