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우애 위해 시문을 짓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2.2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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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③/ 형 월산대군의 사제에 ‘풍월’ 현판 하사

성종 8년(1477년) 10월28일(임술), 월산대군 이정(1454~88년)은 상서해 다시 풍월정(風月亭)의 시를 내려주도록 청했다. 성종은 그 글을 승정원에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일에 풍월정을 두고 시를 지은 것은 감히 시를 짓자고 지은 것이 아니라, 척령의 생각을 다 읊었을 뿐이었다. 대간들이 군주가 시 짓는 것은 잘못이라 말했기 때문에 명해 이를 없애버렸다. 지금 월산대군의 이 글을 보니, 형제 사이의 정분을 스스로 금할 수가 없다. 마땅히 다시 잘 써서 보내야겠다”라고 했다.

척령은 할미새로, 날 때에 들까불면서 큰일이 난 듯이 날아다니므로 형제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음을 비유한다. <시경> 소아 ‘상체’ 편에서 이 새를 두고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했다. 풍월정은 월산대군이 자신의 거처 경운궁(현 덕수궁) 부근에 세운 정자이다.

신료들은 군주가 시문을 짓는 것은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해 성종의 뜻을 자주 막았지만, 성종은 형 월산대군과의 우애를 지키기 위해 자주 시문을 지어 보냈다.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 할미새. ⓒ 연합뉴스

조선 역사상 최대 비운의 인물

성종 8년 8월에는 월산대군의 사제에 왕림해 ‘풍월’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해 현판으로 걸게 하고, 시 여섯 수를 지어서 문신들로 하여금 여기에 화답하게 했다. 서거정이 지은 ‘월산대군 풍월정시에 응제하다’라는 제목의 6수가 현재 전하지만, 성종의 어제시는 전하지 않는다. <성종실록>에는 사관들이 일부러 싣지 않은 듯한데, <열성어제>에도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일찍 흩어져 수습이 되지 않은 듯하다.   

월산대군은 조선 역사상 최대 비운의 인물로 손꼽힌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모친은 곧 인수대비이다. 인수대비는 한확의 딸로, 1455년(세조 원년) 7월에 원자의 빈(왕세자빈)이 되었다. 월산군과 자을산군(잘산군)을 낳아, 1469년 예종이 서거한 후 자을산군이 즉위해 성종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1459년(세조 5년) 9월, 성종의 부친으로서 왕세자였던 도원군(의경세자)이 요절하고, 같은 해 12월에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성종의 숙부인 해양대군(뒷날의 예종)이 왕세자가 되었다. 예종은 1460년(세조 6년) 3월에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해 다음 해 11월30일에 인성대군을 낳았다. 그러나 세자빈은 산후 5일 만에 별세하고, 인성대군도 1463년(세조 9년) 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 뒤 19세의 예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1년 만에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했다. 성종이 즉위하기까지 그 모친 인수대비가 정희왕후(세조의 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인고의 노력을 한 사실은 역사 드라마 <인수대비>에 잘 그려져 있다. 예종이 성종의 거상 때 궁중의 막차에서 거처해 동상이 걸리자, 인수대비(채시라 역)가 진물 나는 발을 씻겨드리는 장면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성종은 즉위한 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 인수대비의 뜻을 헤아려, 1471년(성종 2년) 정월에 왕세자로 요절한 선친을 덕종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는 인수휘숙명의소혜왕후(인수왕후, 소혜왕후)로 책봉했다. 다음 해 1472년(성종 3년) 2월에는 어머니의 호를 인수대비로 올렸다. 그리고 즉위한 지 7년 만인 1476년부터 비로소 정치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월산대군이 지은
세간사에 무심하고자 했던 월산대군 

성종의 왕권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정희왕후, 인수대비와 한명회는 월산대군의 마음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1471년(성종 2년) 3월에 나라에서 신숙주와 한명회 등 73인에게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했다는 공로로 좌리공신이라는 훈명을 내렸는데, 이때 월산대군은 2등에 책록되었다. 이 책봉은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이 종실의 대표 격인 구성군 준(浚)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한다. 

월산대군은 세조가 세자빈 한씨를 위해 지어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했다. 아우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고 어머니 한씨도 입궐하게 되자 그곳에 홀로 거처했다. 1484년(성종 15년)에는 양화도 북쪽에 있던 효령대군의 희우정을 차지한 후 망원정이라 고쳐 부르고 그곳에 자주 나가 노닐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치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의 시조는 세간사에 무심하고자 했던 그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준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월산대군을 왕위의 정통 계승자로 보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성종 8년 윤 2월18일(병진)에는, 두 중이 봉선사 조사의 심부름이라고 하면서 집에 이르렀다. 그들 가운데 옥봉이라는 자가 소매 속에서 글 한 통을 주었는데, “이 땅을 셋으로 나누어서 국중은 귀산군을 세우고, 동경은 강군을 세우고, 서경은 나를 세운다”라고 했다. 끝에는 “대사월(음력 12월) 재생명(음력 초사흘)에 병조판서 이극배는 맹세해 말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역모의 뜻이 분명하다.

월산대군은 몸을 사려야 했다. 성종은 월산대군에게 못내 미안했다. 성종은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경운궁으로 자주 행차했으며, 시를 빈번하게 주고받았다. 월산대군의 망원정에는 현판에 어제시를 걸게 했다. 김종직의 <점필재집>에 실려 있는 <어제망원정(御製望遠亭)> 8수 가운데 첫 수는 다음과 같다.

 

화려한 정자가 푸른 숲 사이에 있어

경치는 마치 그림을 구경하는 듯하다

봄 강물은 비취빛으로 흐르고 

눈 산은 부용(연꽃)을 깎아놓은 듯하다

털끝 하나까지 물상은 또렷하기에 

일만 경관을 시선 끝까지 다 바라보노라

하늘이 근심 없는 영역을 내주어

끝내 낚싯대를 하나 드리웠구려 

華亭翠靄間(화정취애간)

雲物?圖看(운물화도간)

翡翠流春渚(비취류춘저)

芙蓉削雪巒(부용삭설만)

一毫明物象(일호명물상)

萬景極遊觀(만경극유관)

天借無憂域(천차무우역)

終垂一釣竿(종수일조간)

 

월산대군은 어머니 인수왕후의 병을 간호하다가 죽었다. 후손들은 불행했다. 장남 덕풍군은 22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덕풍군의 장자 파림군도 요절했다. 셋째 아들인 전성도정은 을사사화 때 죽게 된다. 덕풍군의 차남 계림군은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을사사화 때 역모로 몰려 죽었다. 이로써 월산대군의 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서울 서초구 우면산은 월산대군의 태를 묻은 곳이기에, 태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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