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대책, 소프트웨어는 불량
  • 노진섭 기자·김형민 인턴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11.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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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공항·원전 비상발전시설 긴급 현장 점검

지난 8월3일 새벽 2시50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인제대학교 일산 백병원은 암흑천지로 변했다. 비상발전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1시간 반 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환자들이 공포에 떨었다. 119 구급대가 이송한 응급 환자를 받지 못해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무정전 전원장치(UPS)가 작동해 중환자실의 인공호흡기는 멈추지 않아 인명 피해는 없었다.

대정전이 발생하면 병원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생명과 직결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원은 대정전 사태에도 전력을 우선 공급받는 주요 기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전력이 들어오기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 시설을 갖추어야 한다. 발전 시설은 대부분 잘 갖추어져 있고, 직원들이 24시간 시설을 관리한다.

지난 11월20일 세브란스병원 로비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환자들은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감상했다. 로비를 지나 지하로 향했다. 일반인 제한 구역 표지가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상의 평화로운 풍경과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공장처럼 웅장한 비상발전기 5대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대병원과 삼성서울병원도 규모는 다르지만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각 병원에서 전기 시설을 담당하는 책임자들은 정전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며 시설을 자랑했다.

병원에 공급되는 전기가 끊어지면 비상발전기가 가동된다. 그러나 비상발전기가 가동되기까지는 수십 초의 시간이 걸린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정도에도 의료기기는 망가지고, 수술실이나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는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서 비상발전기가 가동될 때까지 UPS라는 장비가 작동해서 짧은 정전 시간을 메워준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 위치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세브란스병원에 갖춰진 비상발전시설 통제센터. ⓒ 시사저널 최준필
비상발전기 연료 부족 심각

이대로라면 어떤 정전 사태에서라도 병원 환자들은 무사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이런 발전기를 시험해볼 수가 없다. 각 병원은 수시로 시험 운전을 하면서 발전기 상태를 점검한다. 그러나 실제 비상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병원 관계자는 “실제로 병원의 모든 전원을 차단하고 비상발전기를 돌려보아야 하지만, 병원 특성상 그렇게 하면 큰 혼란이 생긴다. 모의 훈련을 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일부 시설의 전원을 차단했을 때에도 전산 체계에 오류가 생긴 적이 있다. 그러니 수술실 등 주요 시설의 전기를 끊고 비상발전기를 돌려볼 수 없다. 일산 백병원도 시설을 수시로 점검했음에도 실제 상황에서 비상발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라며 모의 시험의 한계를 설명했다.

병원들은 비상발전기 용량을 강조한다. 대학병원들은 전기 사용량의 50~80% 정도를 비상발전기로 확보할 수 있다. 일반 병실, 복도 등 크게 중요하지 않은 곳에는 최소한의 전기만 공급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이다. 전기가 신속하게 복구되면 다행이지만, 만일에 정전이 장시간 이어지면 비상발전기도 버틸 재간이 없다. 비상발전기를 장시간 작동하려면 연료가 필요하다. 대부분 경유를 사용한다. 그래서 병원 지하에는 대형 연료탱크가 묻혀 있다.

세브란스병원에는 20만ℓ, 서울대병원에는 1만ℓ, 삼성서울병원에는 16만8천ℓ 용량의 연료탱크가 있다. 그런데 이 연료탱크에는 경유가 40~50%만 들어 있다. 박상진 세브란스병원 시설부처장은 “현재 경유 10만ℓ를 보유하고 있다. 정전 때 4일 정도 비상발전기를 돌릴 수 있는 양이다. 비상시에는 인근 주유소에서 8만ℓ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계약이 되어 있다. 그러면 7일까지 버틸 수 있다. 국제 의료기관 평가 기준(JCI)에 따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서울대병원과 삼성서울병원은 현재 연료량으로 7~10시간 정도 버틸 수 있다. 병원 관계자는 “유사시에 인근 주유소에서 부족한 경유를 공급받도록 계약되어 있어 오랜 시간 발전기를 작동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정전 사태 때는 주유소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즉, 주유소 지하에 있는 경유를 퍼올리기 위해 전기가 필요한데, 사실상 경유를 공급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에 대한 대책을 묻자 병원 관계자는 “주유소가 어떻게 경유를 공급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발전 시설을 잘 갖추고 있는 대학병원의 실정이 이렇다. 비상발전기의 발전량, 발전기 대수, 연료탱크 규모, 경유 확보량 등이 제각각이다.

지난 6월 서울메트로 직원이 정전으로 작동이 중단된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열어 대피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발전기 용량 등에 대한 정부 규정 없다”

병원 관계자들은 정부의 기준(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병원 관계자는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놓으면 각 병원이 기준에 맞추고, 필요에 따라 보강 시설을 추가하면 더 효과적인 대비책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의 의료기관 전기 시설 담당자는 “30개 병상 이상의 병원에 발전기 한 대를 두라는 규정은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구체적인 규정은 없다. 정전이 발생해도 수 분 내에 복구되므로 국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비상발전기는 기계이다.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전기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인건비 탓에 대부분은 용역회사 인력을 쓰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은 전기 담당 직원 34명이 정직원이지만, 서울대병원은 인력 50~60명 가운데 정직원은 다섯 명뿐이다. 삼성서울병원도 58명 중 다섯 명만 정직원이고 나머지는 삼성에버랜드 파견 직원이다. 병원 관계자는 “정식 직원의 평균 연봉은 6천만원이다. 용역 직원의 연봉은 2천만~3천만원이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용역 직원을 사용하는 병원이 많다. 월급이 2백만원도 안 되는데 제대로 된 전기 기술자가 있겠는가. 용역 직원은 책임감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비상 상황에서는 전문가가 필요한데,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문제는 다른 기관에서도 나타난다. 대정전에 대규모의 인적·물적 피해가 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공항이다. 인천공항은 한 해에 2만3천 편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며, 3천5백만명이 이용하는 시설이다. 지난 11월21일 인천공항을 찾아 전기 계통 관계자들을 만나 대정전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듣고 관련 시설을 살펴보았다. 인천공항은 세 곳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 서인천복합발전소, 경서변전소, 열병합발전소이다. 이 중에서 열병합발전소는 인천공항에만 전기를 공급하는 인천공항 자회사이다. 인천공항은 하루에 6만~7만㎾의 전력을 소비하는데, 열병합발전소의 전력량은 12만㎾이다. 서인천복합발전소와 경서변전소의 전원 공급이 차단되어도 전기 공급에 문제가 없는 셈이다.

원자력발전소는 점검·보고 체계가 생명

공항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관제탑이다. 외부 전원이 차단되어도 8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비상발전기를 갖추고 있다. 항공사와 민간 협력사가 각각 41대씩, 총 82대의 비상발전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 발전기를 돌리는 데 필요한 경유를 공항 내의 주유소에서 공급받으면 최대 일주일 동안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전기 시설 담당 직원의 대다수는 용역업체 사람들이다. 공항 관계자는 “전체 직원의 80%에 해당하는 1백50명이 한전 KPS 용역업체 직원들이다. (고리 원전 정전 사고의 주원인이 용역업체 직원의 작동 실수였던 만큼) 수시로 용역업체 직원들에 대한 교육을 하고, 용역 직원들의 수준 또한 충분히 전문적이다”라고 주장했다.

국가 주요 시설에서는 평소 비상발전 설비에 대한 점검과, 이상이 발생했을 때 보고하는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명이다.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한 사고가 고리 원자력발전소의 사례이다. 지난 2월 고리 원전이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다. 원전을 가동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력선이 3회선 있다. 그런데 두 개 회선은 정비 중이었고, 나머지 한 개 회선은 시험하던 중에 전력이 차단된 것이다. 이때 두 대의 비상디젤발전기가 작동해서 2시간 정도 전원을 공급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에 한 대는 정비 중이었고, 나머지 한 대는 작동하지 않았다. 대체 수동발전기가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다행히 12분 만에 외부 전력선이 복구되어 큰 사고는 피했다. 만약 고리 원전에 전기가 장기간 공급되지 않았다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방사능이 외부로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는 “그 사고는 사실상 크지 않았다. 모든 원전에는 비상디젤발전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상디젤발전기가 작동하는지에 대한 점검과 보고이다. 원전은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그러나 사고 당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비상디젤발전기의 오작동 여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또, 원전에 대한 점검도 15개월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등 점검과 점검 사이의 공백이 너무 길다”라고 지적했다.

정전 보고 체계 개선안 여전히 미흡

원전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 기관인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사실을 즉시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보고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관계자는 “고리 원전 사고는 한수원의 보고 은폐가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상 각 원전이 보고하지 않는다면 위원회에서도 제대로 상황을 알지 못한다”라고 강조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안전기술원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전문가들을 원전 현장에 파견하도록 요청한다. 기술적 관리·감독을 수행하는 원자력안전기술원 관계자도 “비상발전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평소에 알 수 없다. 고리 원전의 비상발전기도 사고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2월에는 작동되었다”라고 말했다.

고리 원전 사태 이후 한수원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재발을 막기 위해 20가지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보고 체계와 전력 설비를 보강하고 검사 체계를 개선하는 등의 정비 대책이 나왔다. 그러나 개선했다는 보고 체계는 기존의 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수원과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자동 통보 체계(ATOM CARE)를 사용한다. 그러나 원전을 정비할 때에는 자동 통보 체계를 꺼둔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원전을 정비할 때에도 이 체계를 켜두기로 한 것이 개선 내용이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대표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관리·감독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보고하지 않은 한수원 자체는 물론이고 한수원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무능도 문제이다. 원전에 정전 사고가 발생하면 그에 따른 사고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자칫 방사능이 유출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대정전 개념 자체부터 모호" 

전문가들은 한국의 전기 관리 능력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웬만한 정전 사고는 감당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비해야 할 정전은 지난 9·15 정전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역 정전’이다. 사실 9·15 정전 사태는 흔히 생각하는 광역 정전, 즉 블랙아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과거 2003년 미국 동북부 전체를 암흑으로 만든 광역 정전이 대표적인 블랙아웃이다. 발전기 전체가 가동을 멈춰 대도시가 모두 작동 불능이 되어야 블랙아웃이라는 것이다.

국회 입법조사관의 제보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블랙아웃이 공학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즉, 개념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부(지경부)가 판단하는 블랙아웃의 주원인은 예비 전력량의 부족이다. 예비 전력량이 부족해 전력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단계별 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9·15 정전이다.

겨울철 전력 수급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에 지경부는 11월16일 겨울철 전력 수급 대책을 발표했다. 그 대책에 따르면 주의 단계에서 순환 단전 준비에 들어가고 예비 전력이 1백만㎾ 아래로 떨어질 때 순환 단전이 시행된다. 순환 단전은 지경부의 정책에 따라 한전이 시행한다.

문제는 어느 지역이 단전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경부 관계자는 “순환 단전 순서는 1순위 주택, 2순위 상업, 3순위 산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택은 전국구 단위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사실상 어디가 단전될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한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전문가는 지경부의 예비 전력 보충을 위한 순환 단전 정책으로는 9·15정전 사태가 반복될 위험이 있다고 평가했다.

지경부 관계자는 “그런 위험을 막기 위해 순환 정전이 시행되기 이전에 문자를 발송하거나 방송을 통해 알린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정전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우선순위에 지정된 지자체장 및 지역 주민과 합의해야 한다.

 


 
 

은행·주식시장·방송·통신은?

국가 중앙 은행인 한국은행 전산 시스템과 시중 은행들의 전산 정보는 대정전에 안전한 편이다. 한국은행은 48시간 전산시스템을 돌릴 수 있는 석유를 자체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 일선 영업점에서는 대혼란이 불가피하다. 지점과 자동현금지급기(ATM)는 비상 전력 장치를 가동해도 2시간밖에 버티지 못한다. 기업·개인 고객들의 입출금과 결제 업무는 모두 멈춘다. 수출입 기업들은 해외 결제 방법이 막힌다. 한국거래소(KRX)는 16시간 버틸 수 있는 비상발전용 경유를 확보하고 있다. 주식시장이 열려도 거래는 중단될 수밖에 없다. 민간 증권사와 개인 투자자들의 홈트레이딩 시스템(HTS)이 막히기 때문이다. 휴장 조치가 불가피하다.

방송국은 예비발전기를 통해 1~3일 방송할 수 있다. 하지만 시청자는 정작 TV를 켤 수 없기 때문에 재난 방송 자체를 시청할 수 없다. 건전지로 켜는 라디오 정도만 청취할 수 있다. 윤전기가 멈추게 되어 신문 발행도 불가능해지고, 컴퓨터에 전원 공급이 안 되어 인터넷 접속도 어렵게 된다. 휴대전화 사용도 불가능하다. 전파를 송수신하는 이동통신사 기지국은 배터리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2시간 정도이다. 가정의 유선전화는 자체 발전기를 갖춘 전화국이 전화선을 통해 전력을 공급하기 때문에 18시간 정도 이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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