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일어나 나라 걱정하는데 경들은 누워 잠만 자다니…”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1.1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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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 은둔 신하들에게 국가 운영 협조 청한 <비빙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에 위치한 조선 7대 세조의 광릉. ⓒ 시사저널 임준선
세조는 재위 10년(1464년) 음력 7월4일(을묘), 신숙주를 속여 벌연(罰宴)을 차리게 하려고, 주서 유순(柳洵)을 불러 자신이 지은 <적병시(積餠詩)>와 소주 다섯 병을 가지고 신숙주의 집으로 가게 했다. 당시 세조는 화위당에 나아갔는데, 인순부윤 한계희와 행 상호군 임원준 등이 입시하고 있었다.

지금 네게 내가 친히 지은 <적병시(積餠詩)> 1봉과 쌍화병(雙花餠) 1합, 소주 5병을 부치니, 네가 가지고 신숙주의 집에 가라. 술병은 별감을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하되, 마치 하사하여 보내는 척하고, 시는 네가 가지고 가되 공사로 문서를 건네는 것인 척하라. 네가 그 집 문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그 집에 전해 주고 곧바로 말을 달려서 돌아오라. 네가 붙잡히면 네가 이기지 못한 것이 되고 그쪽에서 너를 붙잡지 못하면 신숙주가 이기지 못한 것이 되어, 그가 벌연을 베풀어야 한다.

신하들에게 <비빙가>에 대한 평 구하기도

유순은 왕명을 받들고 신숙주의 집에 가서 얼른 어제 시와 소주병을 전해주고는 곧바로 말을 달려 돌아왔다. 봉함 속에 든 것이 세조의 시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신숙주는 유순을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유순이 궁궐로 돌아와서 신숙주에게 붙잡히지 않고 돌아온 이야기를 아뢰자, 세조는 웃으면서, “신숙주가 벌연을 베풀어야 한다” 하고는, 유순에게 녹비(사슴 가죽) 한 장을 내려주었다.

한참 있다가 신숙주가 예궐하자, 세조는 어서 화위당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신숙주가 들어가자, 세조는 “지혜로운 자라도 1천번 생각하는 중에 반드시 한 번 실수는 하는 법이다. 경이 지금 내게 속았으니 즉시 술을 올리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 일은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군주의 장난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세조가 신숙주와 얼마나 격의 없이 지내려고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애석하게도 세조가 친히 지은 <적병시>는 전하지 않는다.

이보다 3년 전, 세조 7년(1461년) 음력 9월19일(병진)에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신숙주가 비빙연(飛氷宴)을 베풀자, 세조는 술과 풍악을 내려주었다.

비빙연은 첫눈이 내린 것을 기념해 베푸는 잔치였다. 그 전날 첫눈이 내리자 세조는 신숙주에게 말해 여러 정승들과 모여 잔치를 벌이게 했다.

잔치 때 세조는 자신이 지은 <비빙가(飛氷歌)>를 마치 자기가 보낸 것이 아닌 양 속여서 신숙주에게 내려주었다. 그 노래는 5언 6구의 특이한 형식이다.

 

배부른 백로는 이미 날아갔어도

뜰의 국화는 서리 속에 그대로 꼿꼿하다

아침 해가 우리 해동을 비추니

거북과 물고기가 창랑에서 뛰노는구나

꿈 깨어 일어나 나라를 경영하건만

잠자는 사람은 깊은 방에 누워 있다니

 

鷺旣飽飛(추로기포비)

庭菊猶傲霜(정국유오상)

旭日照海東(욱일조해동)

龜魚躍滄浪(구어약창랑)

夢覺起經營(몽교기경영)

睡者臥深房(수자와심방)

 

이 노래의 첫 연(제1~2구)은 가을의 풍광을 노래했다. 민간에서 유유자적하는 백로와 국가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충성스런 국화를 대비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둘째 연(제3~4구)은 국가가 중흥해 상서로운 기운이 온 나라에 가득함을 노래했다. 셋째 연(제5~6구)은 나라를 경영하는 국왕과 깊은 방에 누워 있는 은둔자, 혹은 게으른 신하를 대비시켰다. 누워 있는 사람이란 후한 때 낙양에 사는 원안(袁安)이라는 현자가 폭설의 날에 집 밖에 나오지 않고 누워 있던 고사를 끌어온 것이다.

세조는 이 시를 적어 임영군과 계양군 등에게 보이며, “신숙주를 속이자” 하고는 윤필상으로 하여금 계양군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하여 봉함 서찰을 전해주고는 급히 돌아오게 했다. 신숙주는 뒤늦게야 세조가 지은 시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쫓아갔으나 윤필상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죄하는 시를 지어 예궐했다. 신숙주의 시도 5언 6구이다.

임금의 은혜는 비이슬처럼 촉촉하고

하늘 기운은 바람서리가 엄숙하여라

일어나 시물(時物·눈)을 대하매

감격의 눈물 방울방울 옷을 적신다

미천한 신하는 아직 꿈속에 몽롱하여

감히 이것이 천방에서 나왔다고 이르네

 

天恩滋雨露(천은자우로)

天氣風霜(천기늠풍상)

興言對時物(흥언대시물)

感涕沾浪浪(감체첨낭랑)

微臣夢猶迷(미신몽유미)

敢道發天房(감도발천방)

 

신숙주는 이 시를 통해 군주의 은덕을 칭송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아직 국가 경영의 의지를 다잡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국정에 협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냈다. 세조는 신숙주를 교태전에서 인견하고 아울러 여러 재상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다른 신하들에게는 차운하게 하여 모두 극진히 즐기다가 파했다. 이때 신숙주에게 잔치 비용으로 쌀 10석을 주었다고 한다.

유신들은 차운시들을 시축으로 만들고, 서거정은 서문을 썼다. 그 서문과 세조의
<비빙가>는 <열성어제>에 실려 전한다. 서거정은 세조의 <비빙가>를 이렇게 평했다.

 

천어혼성(天語渾成) 왕양함축(汪洋涵畜) 유무궁지사(有無窮之思) (임금님의 말씀은 천연으로 이루어져, 넘실넘실하고 함축이 많아서 무궁한 뜻을 지니고 있다.)

 

세조는 이 시에 주(註)를 달면서 세(世)와 출세(出世)의 두 개념을 대비시켰다. 세(世)는 입조(立朝)를, 출세(出世)는 퇴장(退藏)을 의미한다. 세조는 불교에서의 세간과 출세간이란 말을 빌려와서, 자신의 조정에 나오지 않으려는 신하들을 질책하고 국가 경영에 협조하라고 촉구하는 뜻을 담은 듯하다.

세조는 신하와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유신들에게 상세한 주를 달게 하고 또 서거정에게 서문을 쓰게 했다. 서거정은 세조가 <비빙가>를 널리 선포하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시를 두고, ‘무궁한 뜻을 지니고 있다’라고 한 것이다.

세조는 자신의 <비빙가>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비빙가>의 일이 있은 지 5년이나 지난 재위 12년(1466년) 음력 4월15일(을묘)에 경복궁 후원에 있는 서현정에서 대신들과 담소하다가 자신이 지은 <비빙가>를 내어 보이며 신하들에게 평가를 청했다. 신하 가운데 병조참판 구종직은 “<비빙가>는 <시경> 3백편이 못 미칠 정도입니다”라고 찬사를 올렸다. 대사헌 양성지는 구종직이 성상에게 구차하게 아첨하므로 그를 죄 주어야 한다고 청했다. 세조는 두 사람을 시켜 다시 옳고 그름을 힐난하게 했다.

세조는 웃으며, “경은 대사헌과 더불어 굳이 다투려 하는가”라고 했으나, 구종직은 할 말을 전부 하면서 다투었다. 구종직이 말을 많이 하자, 세조는 “경은 글로도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 술을 내려주었다.

<세조실록>의 기사는 “상이 양성지를 옳게 여기고 구종직의 아첨을 그르게 여겼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세조의 의중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군 시절, 아우 안평대군의 문학적 재능을 질투하던 그였기에, 이때 이르러 나도 시를 꽤 잘 짓게 되었다고 안도하며 구종직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세조는 젊어서 문학을 공부하지 않아 열등감이 있었고, 국왕이 된 뒤로도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열등감을 갖게 된 것은 실은 부왕 세종이 문학에 뛰어난 안평대군을 편애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세종이 자신보다 안평대군을 편애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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