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 울린 어린 임금의 슬픈 노래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1.0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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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② / 폐위의 아픔 담은 <자규사>, 여러 형태로 전해져

단종묘 ⓒ시사저널 우태윤
지난 호에 단종의 <자규사>를 짧게 소개했다. 원문으로는 불과 12글자뿐이었고, 풀이하면 ‘달 밝은 밤, 촉왕 혼령(자규) 울 때, 수심 가득 머금고, 누대 머리에 기대섰노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실제로는 조금 길게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다른 문헌들에 인용되어 있는 노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月白夜 달 밝은 밤                           

蜀魂 촉왕 혼령 울 때                

含愁情 수심 가득 머금고               

倚樓頭 누대 머리에 기대섰노라         

爾啼悲 네 울음 슬퍼서  

我聞苦 내가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 네 소리 없으면                 

無我愁 내 시름 없으리라              

寄語世上苦勞人  

온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시게

 

한 구절마다 세 글자씩으로 나가다가 끝부분에 호흡이 달라지는 노랫말 체이다.

또 다른 버전도 있다.

 

月欲低 달이 낮게 기울 때

蜀魂啼 촉왕 혼령 슬피우네   

相思憶 그리워 그리워 

倚樓頭 누대 머리에 기대섰노라 

爾聲苦 네 울음소리 괴롭기에 

我心悲 내 마음도 서글퍼라

無爾聲 네 소리 없으면                 

無我愁 내 시름 없으련만             

爲報天下苦惱人 

온 세상 고뇌하는 이들에게 알리나니

愼莫登 부디 오르지 마시게

春三月 춘삼월에

子規啼 자규가 

山月樓 산엣 달 뜬 누각에서 울 때에는

 

이것도 대개 한 구절마다 세 글자씩이지만, 중간에 일곱 자의 구절이 있다. 글자 수를 반드시 정돈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단종의 노래는 원래 한시가 아니었을 듯하다. 우리말로 된 노래를 누군가가 한자 시로 번역하다 보니 서로 다르게 표기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전해들은 노래를 번역하다 보니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을 듯하다. 단종의 이 슬픈 노래를 듣고 나라 사람 가운데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단종은 또 칠언율시 형식의 <자규사>를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원한 맺힌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그림자 하나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마다 잠을 청해도

잠들 겨를이 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써도

한은 끝이 없구나

울음소리 새벽 산에 잦아들면

잔월이 희고

봄 골짝에 토한 피 흘러

붉은 꽃 떨어지네

하늘은 귀 먹어서

슬픈 하소연 못 듣는데

어쩌다 수심 가득한 이 사람만

홀로 귀 밝았는고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胡乃愁人耳獨聰(호내수인이독총) 

어느 시가 단종의 슬픈 심사를 가장 잘 담아낸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대의 지식인들도 다투어 <자규사> 지어

당시 단종의 폐위와 죽음을 목도한 지식인들도 <자규사>를 지었다. 세조 원년인 1455년에는 강원도 김화 초막동에 은퇴해 있던 박계손이 조상치와 함께 <자규사>를 주고받았다. 단종의 죽음 이후에 김시습도 <자규사>를 읊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단종의
<자규사>와는 별도로,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한 사실 자체에 비분을 느껴 곳곳에서 자기 나름의 <자규사>를 짓고, 또 슬프게 노래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규사>는 당시의 유행가였다. 누가 처음 부르고 누가 따라 부르고 한 것이 아니었다. 단종의 시라고 전하는 것도 이름 없는 선비나 민중들이 단종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부르던 노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민속에서는 도성 안이나 길거리, 냇가에서 당(幢)·번(幡)을 세우고 떡과 과일을 베풀며 승려를 맞이해 와서 죽은 혼을 소리쳐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한 풍습에 비추어볼 때, 세조 정권은 단종의 초혼례가 대규모로 거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단종이 영월에서 죽은 이듬해 1458년(세조 4년) 봄, 세조는 계룡산 동학사에 명해 초혼각을 세워 단종을 제사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무마책에 불과했다.

<정조실록>에 보면 정조 15년(1791년) 음력 2월6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영월 지역을 순찰하다가 자규루 터를 찾아 중건하려 하니 민가의 불탄 자리에서 그 터가 저절로 드러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경연관 이만수(李晩秀)가 아뢰었다. 그러자 정조는 자규루를 찾아 중건한 뒤 예관을 보내어 단종의 무덤인 장릉에 고유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기이하고도 기이하도다. 어찌 한 누각이 허물어진 것을 수선하는 것만이 각기 때가 있다고 말할 뿐이겠는가. 옛터를 찾을 때 불이 갑자기 일어나 다섯 채의 오두막을 태우고 바람까지 불어 그 형세를 도와 재와 모래를 쓸어서 날려 보내 옛날 기왓장이 흙 밑에서 드러나고 무늬 있는 주춧돌이 옛터에서 드러났다. 심지어 한겨울 깊은 산골에 사흘 동안이나 큰비가 내려 높은 산비탈에 쌓인 눈을 녹여 버려 나무를 베고 돌을 캐낼 수 있었다. 이것들을 동짓달과 섣달 사이에 실어 내어 정월에는 기초를 닦고 2월에는 기둥을 세웠으니, 그 일이 신속히 성취된 것을 보면 귀신의 이치가 사람의 마음과 잘 어울린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정에서는 제반 사실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런데 때마침 사육신의 충절에 대해 생각이 나고 감회가 일어 그 일만을 위해 사신(史臣)을 보내어 금궤 석실에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상고해 오도록 했는데, 사신이 돌아와 복명한 날이 곧 자규루의 기둥을 세운 길일이었으니, 이를 우연하고 범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사 올리는 전례에 대해서는 따로 관각(館閣)의 초기가 올라왔기에 비지를 내리려 하고 있었던 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이미 듣고 나서도 누각을 중건하는 일을 어찌 도신으로 하여금 녹봉을 덜어 내어 경영하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공곡(公穀)으로 회감(會減)하도록 하라.

상량문은 내각의 원임 제학 좌의정이 지어 올리고, 기문은 원임 제학 이 판부사(이만수)가 지어 올리고, 편액은 홍문관 제학이 쓰도록 하라. 상량문과 기문은 도신과 해당 수령이 나누어 써서 봉심하도록 하라. 예관이 갈 때 한식의 제향에 맞추어 가서 누각을 세운 일과 제사를 올리는 일의 사유를 겸하여 고하도록 하라.

정조는 금성대군 이유와 화의군 이영은 물론 사육신의 절의에 버금가는 사람들을 내각과 홍문관에서 조사하도록 해, 장릉에 모두 31인을 배식하게 했다. 이로써 역사의 아픈 기억을 도려내고, 정의의 삶을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치가 전도되고 아무 전망도 지닐 수 없는 혼돈된 세계를 뒤바꾸려면, 정조대왕이 그렇게 실천했듯이, 과거 역사에 대한 진심어린 성찰을 토대로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공동의 기억을 새로 만들어나가야만 한다.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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