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규의 울음에 통한을 담아 토하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2.10.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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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시문 / 폐위의 쓰라림을 읊은 <자규사>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자규루.
세조는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신하가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김문기도 처형했다. 병자년에 일어난 재앙이라 해서 병자화라고 한다. 세조는, 단종의 외삼촌으로 여섯 신하의 모의에 참여했던 권자신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도 참형했다. 그리고 이듬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그 후 경상도 순흥부사 이보흠이 금성대군 이유와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세조의 넷째 아우인데, 사육신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순흥에 유배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있자, 좌찬성 신숙주는 단종을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영의정 정인지와 좌의정 정창손, 이조판서 한명회도 거들었다. 이렇게 해 1457년 10월24일, 단종은 마침내 영월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보다 앞서 1457년 6월, 단종은 처음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청령포에 거처했으나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길 우려가 있다고 해서 객사의 동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단종은 매죽루에 올라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슬픈 심경을 위로했다. 매죽루를 지금은 자규루라고 부른다. 단종이 그곳에서, 촉나라 임금 두우(杜宇)가 신하에게 쫓겨나 죽은 뒤 자규새로 환생해 밤마다 피나게 울었다고 하는 고사를 떠올리며 다음 시를 읊었기 때문이다. 

 

 달 밝은 밤           

 촉왕 혼령(자규) 울 때                  

 수심 가득 머금고               

 누대 머리에 기대 섰노라              

 

月白夜(월백야)  蜀魂(촉혼추)

含愁情(함수정)  依樓頭(의루두)

 

단종의 이 시를 <자규사(子規詞)>라고 한다. 다른 형태의 시로도 전한다.

뒷날 생육신으로 추앙되는 원호(元昊)는, 단종 초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다가 수양대군의 위세가 날로 강해지자 병을 칭하고 향리인 원주로 돌아갔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가자 강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기도 하고 문을 닫아걸고 책을 쓰며, 단종의 거처를 향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시절을 한탄하는 노래를 지었다. 제목을 <탄세사(歎世詞)>라고 한다. 

동쪽 산마루를 보니  瞻彼東岡

솔잎이 푸르러라   松葉蒼蒼

캐다 찧으면   采之之

고픈 배를 채우겠지  療我飢腸


아득히 하늘 한쪽 바라보매  

目渺渺兮天一方

오색 구름 궁궐 생각에 마음이 어둡구나

懷兮雲五光

아아, 백이 숙제여 아득해 짝할 이 없구나

嗟夷齊邈焉寡兮

부질없이 수양산에서 푸른 풀만 캤다니

空摘翠於首陽

세상 사람 모두 의를 잊고

이익만 따르는데

世皆忘義徇祿兮

□□□□ 방황하고 있노라.

□□□□而徜徉

김시습도 단종의 처지를 촉나라 왕 두우에게 비겨 <자규사>를 불렀다. 그리고 나뭇잎과 풀잎에 시를 적어서는 물에 띄워 보내곤 했다. 김시습의 친구 송경원은 스스로 맹세하는 시를 지어서, ‘살아서는 산속 사람이 되고, 죽어서도 산속 귀신이 되려네’(生爲山中人, 死爲山中鬼)라고 했다. 김시습은 그와 부둥켜안고 울었으며, <채미가(採薇歌)>를 부르며 영월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채미가>는 고죽국의 왕자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은 수치라고 여겨 수양산에 숨어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불렀다는 노래이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왼쪽)와 청령포 안 단종대왕 유배지(오른쪽).
김시습이 글로 풀어낸 울분

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려고 제후를 이끌고 출전하자 백이와 숙제는 말머리에 나아가 시역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무왕이 듣지 않자,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으로 들어갔고, 결국 굶어서 죽었다. <사기>에서 역사적 인물들의 활동을 기록한 열전의 맨 첫머리에 <백이열전>이 있고, 그 속에 이 <채미가>가 인용되어 있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폭(暴)으로 폭(暴)을 바꾸면서도

잘못을 모르다니

신농·우(虞)·하(夏)는 죽은 지

오래이니 어디로 돌아가랴

아아 떠나가리라 운수가 쇠하고

말았도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때 인간 심성 속에 야수가 자라난다. 그렇기에 ‘폭=폭정’이라 해도 더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킨 것은 폭정을 종식시키자는 것도 아니었다. 이른바 선양의 형태를 빌어 왕위에 오르고 더구나 조카를 살해한 것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었다. 당시 절의를 지킨 지식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단종이 영월로 쫓겨난 뒤 왕비 송씨(정순왕후)도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정업원에서 비구니가 되어야 했던 왕비가 단종이 떠난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곳이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계유정난과 병자난을 거친 공신들은 송씨를 공신비로 달라고 하기도 했으나, 세조는 차마 들어줄 수가 없어, 송씨를 궁중에 들어오게 해 거처하게 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역적의 집과 가솔들을 몰수해 공신들에게 배분했다. 여성들도 그 배분의 대상이었다. 역적죄로 몰려 공신들의 여종이 되는 것을 공신비 혹은 공신비첩이라고 했다.

윤근수의 <월정만필>에 보면, 단종의 왕비 송씨가 관비가 되니 신숙주가 공신비로 삼아서 자기가 받으려 했다고 한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 집현전 동료들과 등지고 수양대군을 위해 활동하고 세조 정권에서 국가 정책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유례없이 학식이 높고 풍모가 컸던 분이다. 그런 분이 단종의 비를 공신비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어쨌든 세조는 정순왕후를 궁중에 들어오게 해 정미수를 기르라 했다고 한다. 정미수는 정종과 문종의 딸 경혜공주 사이에 태어났으며, 뒷날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우게 된다. 당시 공주와 그 소생은 궁중에서 생활했다.

1475년(성종 6년), 수양대군의 찬탈에 울분을 느껴 병조판서직을 그만두고 은퇴했던 절의의 인물 박계손(박숙손)이 죽었다는 소식이 김시습에게 날아왔다. 세조 원년에 강화도 김화 초막동에 은둔하다가 다시 더욱 산이 깊은 함경도 운림산 수한동으로 부형을 모시고 숨어들어가 살던 그가 61세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김시습은 그의 일생 사적을 기록한 <병조판서 박공 행장(行狀)>을 지었다. 김시습이 남을 위해 쓴 유일한 행장이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의 휘(諱)는 계손이고, 입산한 뒤의 휘는 숙손이며, 자(字)는 자현(子賢)이다. 단종 조정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경태 6년(세조 원년, 1455년) 김화의 초막동에 은퇴해 조상치와 <자규사(子規詞)>를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이 아주 애처로웠다. 당시에 조정에서 자주 불렀지만, 깊이 은퇴해 자취를 감출 계획으로 부형을 모시고 문천의 운림산 수한동으로 들어가 스스로 포신(逋臣: 죄 짓고 도망간 신하)이라 호하고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묘지명을 다 읽기 전에 눈물이 볼을 적셨다. 아아! 억센 풀이 질풍을 만나고 우뚝한 기둥이 파도에 시달렸구나. 위대하다 공이여! 공은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그 뒤에 김시습은 박계손의 가계와 생몰·상례·후손에 대해 적고,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나는 산수에 유랑하는 뜨내기여서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고 오직 공만이 나를 알아주었는데, 이제는 끝장이구나. 이제는 끝장이구나. 아!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와 짝이 된단 말인가?

 

누가 김시습에게 이런 짙은 고독감을 안겨주었던가. 권력에 눈먼 자들이 세상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우리는 세상을 한탄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와 짝이 되어 흐느껴야 하는가.  

참고: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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