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독재’ 기쁨에 취한 나라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10.1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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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차베스 현 대통령이 과반 지지 얻어 네 번째 집권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지난 10월7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개표 전 익살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 AFP 연합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0월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네 번째로 재선되었다. 1999년부터 14년 가까이 집권하고 있는 그는 이번 승리로 앞으로 6년 더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이나 암 수술을 받은 그의 건강이 허용한다면 2019년까지 재임하게 된다. 근 20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이다. 그는 이로써 입버릇처럼 자랑해온 베네수엘라 사회주의 혁명을 더욱 자신만만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반미·반서방 사회주의 노선을 21세기의 광기라고 비웃어온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할 말을 잃었다. 베네수엘라 국민이 그를 재신임한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켰다.  

득표가 예상보다는 적었지만 그는 낙승했다. 95%가 개표된 상황에서 54%를 얻어 45%를 획득한 야당 단일 후보 엔리케 카프릴레스 라돈스키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차베스의 승리를 알리는 중간 개표 결과가 공개된 직후 수도 카라카스 거리에는 폭죽이 터지고, 지지자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환호했다. 차베스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설에서 앞으로 사회주의를 더욱 공격적으로 밀어붙이겠다고 다짐했다.

가난한 사람들,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환호

차베스에게 승리를 안긴 세력은 빈민층이었다. 누대의 가난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차베스의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환호했다. 이념 따위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절대 빈곤을 퇴치한 차베스에게서 이들은 희망을 보았다. 차베스가 처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1988년 은행 청소부로 일하면서 셋집에서 살다가 지금은 조그만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한 여인은 “차베스 자체가 혁명이자 변화이다”라고 말했다. 이 여인은 앞으로 6년 안에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할 꿈에 부풀어 있다.  

베네수엘라 혁명에 관한 한 차베스는 천재이다. 그의 재선을 보고 중남미와 중동에서 그의 개혁적 독재를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사회 개혁 프로그램의 최우선 순위를 절대 빈곤을 퇴치하는 것에 두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다. 운도 따랐다. 그가 빈곤 제거에 투입한 돈은 석유에서 나왔다. 1998년에 배럴당 10달러이던 유가는 14년 만에 100달러로 치솟았다. 최근 80달러 선으로 내리기는 했으나 유가 폭등은 그에게 돈벼락을 안겼다. 나라의 국부는 수천억 달러 늘어났다. 역설적이게도 차베스의 노선을 사사건건 견제한 미국도 그를 도왔다. 베네수엘라의 석유는 미국이 사주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네 번째 수출국임을 감안하면 양국 경제가 얼마나 긴밀한가를 알 수 있다. 미국과 베네수엘라는 외교적으로는 서로 으르렁거렸으나 경제적으로는 찰떡궁합이었다. 미국의 반(反)차베스 노선에 동조했던 우방국들만 우습게 되었다.

유권자들의 표심을 움직인 차베스 프로젝트의 핵심은 천문학적 국부를 주택, 교육, 건강, 범죄 소탕, 부패 척결에 아낌없이 투입한 정책이다. 차베스의 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투표율로 나타났다. 이번 선거에서는 81%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가했다. 수십 년 만에 최고 투표율이다. 투표소마다 장사진을 쳤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마감 시간 이후에도 2시간가량 투표가 계속되었다. 전국적으로 14만명의 군인이 경비를 선 가운데 투표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일부 선거 부정 주장이 서방측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차베스의 순항을 담보하는 요인은 한마디로 베네수엘라를 ‘변화’시킨 공로이다. 가난과 부패에 찌든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집권 14년간 역동적인 근대 국가로 변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야당이 훌쩍 성숙했다는 점이다. 독재 풍토에서 야당이 성장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어쩌면 차베스의 도박인지도 모른다. 야당을 키워 국민을 현혹시키는 최면술 같은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선전에 애를 먹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차베스의 독재가 전통적 의미의 독재가 아니라 국가를 개조하고 사회를 바꾸는 차베스 특유의 독재, 다시 말하면 나름의 의미를 갖는 ‘혁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그가 부르짖는 혁명에 반신반의하던 국민은 갈수록 꽃을 피우는 혁명의 모습에 놀랐다.  

차베스 집권 이후 너무나 변모한 나라의 모습에 차베스 자신도 놀랄 지경이다. 행정의 질은 높아지고 교육 제도는 일신되었다. 중산층과 야당이 자진해서 혁명의 대열에 가담한 것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가 한때 ‘쓸모없는(good for nothing)’ 존재로 매도했던 반차베스·반혁명 세력은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산층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들의 절반 이상이 차베스를 지지했다. 뉴욕타임스가 이를 두고 ‘베네수엘라의 전환기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차베스 자신과 측근의 부패 스캔들이 나오지 않는 것도 신통하다.

지난 8월18일 베네수엘라 야당 대선 후보 엔리케 카프릴레스(가운데)가 거리 유세 도중 지지자와 포옹하고 있다. ⓒ EPA 연합
차베스, 건강 유지하고 야당 견제 넘어서야

모든 혁명과 개혁이 그렇듯이 차베스의 전도에는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 무엇보다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건강이 그의 치세를 지켜줄지 의문이다. 지난 15개월 동안 그는 여러 차례의 암 치료를 받았다. 정확한 건강 상태는 비밀로 되어 있다. 당장은 병을 극복한다고 해도 2019년까지 건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야당은 너무나 거세져서 상대적으로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겼으나 12월에 있을 국회의원과 시의원 선거에서 야당의 권토중래를 배재할 수도 없다. 그는 개혁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나, 실행 계획은 현실에 미치지 못한다. 

강경해진 야당을 견제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다. 선거 막바지에 야당 지지자들은 차베스가 야당을 조롱할 때 입는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역으로 차베스를 조롱했다. 야당 후보 카프릴레스는 일요일 밤 차베스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대통령이 되라고 충고했다. 워싱턴에 소재한 정치연구소 ‘미주 간 대화(Inter-American Dialogue)’의 마이클 시퍼 소장은 이번 선거를 “근본적인 전환이다”라고 논평했다. 지금까지 그가 다스렸던 사회가 아니라 각성되고  더 잘 조직되고 또한 더욱 확신에 찬 사회를 다루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이다. 야당이 끊임없는 내분으로 아직까지 일사불란하지 못한 점이 어쩌면 차베스에게는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차베스의 독재는 은연중에 강한 야당을 키웠다. 카프릴레스에게 투표한 한 교사의 말이 인상적이다. “야당은 힘이 있고 지지 기반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두 손이 묶이지 않았다.”

차베스의 국정 장악력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의 앞에 우뚝 선 베네수엘라 사회 또한 도전적이다. 범죄는 증가하고 끊어진 도로와 교량은 도처에 널려 있다. 툭하면 전기가 나가 사회를 마비시킨다. 석유 생산은 한계에 이르러 더는 증산이 안 된다. 수출은 정체되어 있고, 경제 성장은 전도가 어둡다. 높은 인플레이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통화는 조만간 평가절하될 전망이다.

베네수엘라는 크게 보아 부자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나라로 변했다. 차베스는 바로 이 가난한 세력의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했다. 혁명은 이제 제2 단계에 접어들었다. 2단계 혁명의 성공에는 수많은 변수가 걸려 있다. 문제는 독재임을 알면서도 독재를 선택한 국민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를 바라고 있다는 부담이다. 그러나 차베스의 승리 자축 연설을 보면 2단계 혁명이 일단은 좋은 출발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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