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개발업체 가족들, 갱도 막히자 가정도 풍비박산
  • 정락인·조해수 기자 ()
  • 승인 2012.09.0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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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 개발이 중단되면서 회사에 방치된 굴착 장비들. ⓒ 시사저널 임준선
소송전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대륙광업 김태순 회장(작고)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김 전 회장은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다. 큰딸은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큰아들과 셋째아들은 회사 일을 함께했다. 둘째아들은 방송국에 다닌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김회장은 일찍부터 광산업에 눈을 돌렸다.

전남 해남에서는 제법 규모가 있는 납석 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금이 많기로 유명한 음성 지역의 광산 개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1967년 7월에 금광읍과 맹동면 일대의 지하 광구의 광업권(4백만평)을 획득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후 ‘금 모으기 운동’을 보면서 당시의 사업을 정리하고 음성으로 들어왔다. 나라를 위해 금을 캐서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김회장은 금왕읍에 회사 부지 1만5천평도 마련했다. 광구 이름은 ‘태극기’에서 착안해 ‘태극광산’으로 명명했다. 

국내외 연구기관에 의뢰해 ‘금맥’을 측정한 결과 엄청난 양의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회장은 광산을 볼 때마다 금을 캘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금광 개발을 통해 국가와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겠다는 뜻도 무너졌다. 더욱이 소송이 시작되면서 하루하루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김회장은 화병이 생겼고, 뒤늦게 암이 발견되었다. 결국 2003년 6월 금광 개발의 꿈을 펴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김회장의 큰딸인 김선희씨는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김씨는 한국에서의 일을 알지 못했다. 장례를 치르다가 전후 사정을 듣고는 가슴을 쳤다. 이미 집안은 엉망이었다. 투자자들에게 빚을 갚고 소송을 감당하느라 집에는 생활비도 변변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회사 한쪽에 방치되어 있는 굴착기 등 장비들은 잔뜩 녹슬어 있었다.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자 직원들도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났다. 

김선희씨는 미국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는 조립식 컨테이너 건물인 회사 한쪽에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회사 대표를 맡았다. 미국에서 아들 둘을 키우던 평범한 주부였던 김씨의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다.

김씨의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신문 배달, 대리 운전,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했다. 방송국에 다니는 둘째아들은 이혼을 감내하며 변호사 없이 ‘나 홀로 소송’에 나서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의 가족과 회사가 태극광산 개발에 투자한 돈은 지금까지 약 2백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김씨 가족이나 회사의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태극광산의 가치를 높게 산 개인 투자자들이 그나마 힘이 된다고 했다.

김선희 대표에게, 광산 개발에 성공하면 돈은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를 것이다. 창업주인 아버지는 평소 ‘금을 캐면 지역을 위해 사용하고, 장학사업을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우리 가족은 이런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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