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전쟁’과 부딪힌 ‘대테러 전쟁’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6.0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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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빈 라덴 사살 도운 의사에게 33년 징역형…미국 원조 더 받아내려는 전략으로 분석돼

지난 5월24일 파키스탄 신문들은 파키스탄 의사 샤킬 아프리디 박사가 CIA에 협조한 혐의로 3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을 1면에 크게 보도했다. ⓒ EPA연합

미국과 파키스탄의 애증은 깊다. 두 나라 관계는 9·11 사태를 계기로 우호와 적대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미국은 9·11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협조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1천억 달러가 넘는 군사·경제 원조를 파키스탄에 제공했다. 2013년에도 10억 달러가 책정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 나라 북부 산악 지대에서 준동하는 알카에다 진압 작전에서 미국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연합군에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점에서 보면 양국은 분명히 우방국이다. 그러나 지난해 5월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멀지 않은 아보타바드에 은신 중이던 빈 라덴을 미 해군 특공대(네이비실)가 기습해 사살한 사건으로 양국은 외교 단절 직전까지 가는 적대적 관계로 치달았다. 하지만 파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거시적 명분과 양국의 자제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오바마 행정부, 대파키스탄 원조 예산 삭감

양국의 갈등이 가까스로 치유되고 테러와의 전쟁도 거의 마무리되어 미군과 연합군이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전략적 로드맵이 나온 순간에 양국 관계는 다시 파국에 이르렀다. 발단은 빈 라덴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협조한 파키스탄 의사 샤킬 아프리디 박사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33년 징역형을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에 미국이 발끈했다. 미국 상원 세출위원회는 파키스탄의 조치를 우방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대파키스탄 원조 예산에서 3천3백만 달러를 삭감했다. 상원은 이와 함께 아프리디를 즉각 석방하고 그에 대한 기소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당 소속 상원 부총무 리처드 더빈 의원은 빈 라덴의 소재를 파악하도록 미국에 도움을 준 사람을 어떻게 ‘반역죄’로 처벌할 수 있느냐며 미국의 ‘분노’를 파키스탄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조 삭감안이 30 대 0으로 가결된 것을 보면 미국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파키스탄이 즉각 납득할 만한 결정을 하지 않을 경우 의회 상원군사위원회를 통해 추가적으로 원조액을 대폭 삭감할 태세이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문제의 선고를 “정당하지도 않고, 근거도 없다”라고 단정했다. 그는 의사의 석방을 위해 파키스탄 정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양국 관계의 시한폭탄으로 일약 등장한 의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다. 파키스탄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의사는 백신 접종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빈 라덴과 그 가족의 DNA 자료를 수집해 이를 CIA에 넘겨주었다고 한다. CIA는 이 자료를 토대로 빈 라덴의 소재지를 알아내고 그를 사살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외국(미국)을 위해 국익을 배반했으므로 국내법이 규정한 반역죄를 범한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시각은 다르다. 그 의사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테러범에 관한 정보를 우방국에 제공했으므로 그의 행위는 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범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 아프리디의 전력과 국내에서의 위상은 극비에 붙여져 있어 그의 운명이 어쩌다 풍전등화가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그는 CIA에 포섭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 파키스탄과 CIA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포섭 과정의 공개는 또 다른 외교적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CIA가 지난해 초부터 가짜 백신 접종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빈 라덴의 소재를 알아내는 것이 1차 목적이었고 접종은 구실에 불과했다. 의사는 접종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빈 라덴이 은신해 있는 아보타바드를 수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정말 필요한 정보, 즉 빈 라덴 일가의 DNA를 채취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는 빈 라덴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정보를 CIA에 제공하지 못했다. 다만 CIA가 빈 라덴의 소재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극비로 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아보타바드 일원에서 활동하던 알카에다 조직원 일부가 미국에 빈 라덴의 소재를 밀고한 후 도주했다고 한다. 빈 라덴의 목에는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알카에다 요원이 돈에 눈이 멀어 조직을 배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북부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국의 무인기 공격에 의해 포위망이 좁혀오자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 그 후 그의 행방은 5년간 오리무중이었다. CIA는 그러나 빈 라덴이 파키스탄 정보국(ISI)의 비호 아래 파키스탄 내 모처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파키스탄 내 불만 세력과 알카에다 외곽 조직을 상대로 집요한 선무 공작을 폈다. 빈 라덴의 은신처가 수도에서 1.6㎞ 떨어진 파키스탄 군사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정황을 고려하면 그가 파키스탄 정부의 묵인하에 그곳에 은신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빈 라덴이 아보타바드에서 5년이나 은신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23일 파키스탄 카라치 마을에 아프가니스탄의 나토군 기지로 들어가려는 유조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 EPA연합

파키스탄, 연합군의 아프간행 보급로도 봉쇄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은 지난해 5월2일 감행된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사전에 파키스탄에 알리지 않았다. 작전 성공이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발표되었을 때 파키스탄은 주권 침해를 들어 미국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충분히 납득이 되는 대목이지만 파키스탄 정부를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사살 작전 정보를 사전에 알릴 수 없었다.  이 점 또한 이해될 수 있다. 미국과 파키스탄 간에 벌어지는 갈등은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으로 구분된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토라질 때마다 돈으로 해결했다. 파키스탄으로서는 자존심이 구겨지지만 연간 10억 달러라는 돈의 유혹 앞에서 번번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에 대한 중형 선고로 촉발된 이번 갈등에서도 달러는 전가의 보도로 등장했다. 미국의 의사 석방 요구에 대해 파키스탄 정부는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으나 과거의 경우처럼 결국에는 타협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은 그 밖에도 또 다른 문제로 충돌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자기 나라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연합군의 모든 보급 루트를 2개월 전부터 봉쇄했다. 이유는 파키스탄 영토에 대한 무인기 공격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무인기 공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빈발하고 있는 데 대한 반발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 작전을 중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주로 파키스탄 북부에서 준동하는 알카에다 소탕에는 무인기 외에 대안이 없는 탓이다. 미국 상원은 보급로 복원 문제도 원조 삭감과 연계시켰다.

양국 관계에는 표면에 나타난 이슈 외에 전략적 차원에서 이해가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 우선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료되는 것이 달갑지 않다. 이 전쟁이 오래 오래 계속되어야 미국의 원조를 계속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에 대한 중형 선고나 보급로 차단 역시 더 많은 원조를 얻기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말하자면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파키스탄은 돈의 전쟁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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