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금의 칼날 매서워진 삼성 ‘형제 싸움’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2.04.2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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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 재산을 둘러싼 형제간 다툼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상대를 헐뜯는 비방전도 치열하다. 게다가 이들의 다툼에는 소송, 미행 폭로 같은 극적인 요소들도 끼어들어 있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 일가의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재산 싸움은 이제 법정에서 가려지게 된다. 민사 소송의 특성상 언제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소송전의 이면에 깔린 형제자매간 앙금은 어디서 비롯되었고, 싸움의 결말은 어떻게 될지 짚어보았다.

소송으로 맞서 있는 이맹희(오른쪽 ⓒ 뉴스뱅크 )·이건희(왼쪽 ⓒ 시사저널 자료사진) 형제.

삼성그룹 창업주가 남긴 상속 재산을 둘러싼 형제 사이의 다툼이 ‘막장 드라마’로 치닫고 있다. 국내 최대 재벌 오너가 친형을 ‘집안에서 퇴출당한 양반’이라고 폄훼하고, 형은 동생을 ‘철이 없다’거나 ‘탐욕스럽다’라고 헐뜯는다. 소송, 미행, 폭로, 비방까지 드라마 같은 극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지난 4월24일 <한국에서 비즈니스 하는 법>의 저자 톰 코이너의 말을 인용해 ‘이 사람들은 (재미있기로는) 한국 연속극보다 낫다’라고 보도했다. 법무법인 세종 소속 윤재윤 변호사는 “사인(私人) 간 민사 소송에 대해 법정 밖에서 왈가불가하는 것은 재판 예의상 적절치 않다”라고 말했다. 이와 달리 소송 당사자가 재판부에 변론을 담은 준비 서면도 아직 제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장외 신경전이 날카로워지고 있다.

지난 2월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맏아들 이맹희씨와 차녀 이숙희씨는 동생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2008년 12월 실명 전환한 삼성생명 주식 가운데 자신들의 몫을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에는 조만간 합의가 성사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4월 둘째 주 이건희 회장 부부가 하와이에 체류한 누나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을 만나고 오면서 형제자매 사이에 타협이 이루지지 않을까 하는 예상까지 나왔다. 그러나 예상은 적중하지 않았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회장 전용기가 활주로에 닿기도 전에 법무법인 태평양·세종·원 소속 변호사 여섯 명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소송을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이었다.

싸움은 볼썽사납게 장외에서 먼저 벌어졌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 4월17일 출근길에 삼성전자 서초사옥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자기네들이 고소하면 끝까지 고소하고,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 간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회장은 작심한 듯 원색적인 말을 쏟아냈다. “선대 회장 때 벌써 재산 분할이 끝나서 각자 돈을 갖고 있다. CJ도 갖고 있고. 삼성이 너무 크다 보니까 욕심이 나는 것이다.” 이맹희씨는 4월23일 법무법인 화우를 통해 공개한 음성 파일에서 이건희 회장을 비난했다. “최근 건희가 어린애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 당황했다. 건희는 지금까지 형제 사이에 불화만 가중시켰고 자기 욕심만 챙겼다.” 이숙희씨도 서면으로 “왜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 때 (상속 재산이) 다 분재되었다’는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25년 동안 숨겼던 내 재산을 되찾으려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1987년 11월 이병철 회장 장례식에 참석한 삼성가 삼형제. 앞줄 왼쪽부터 이창희, 이건희, 이맹희. ⓒ 시사저널 자료사진

형제의 운명 가른 ‘청와대 투서 사건’

감정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과열되고 있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의 평상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4월24일 다시 서초사옥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여러분이 이맹희씨와 나를 1 대 1로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라고 말을 꺼내며 그동안 숨겨왔던 가족사를 언급했다. 장남 이맹희씨나 차남 이창희씨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밀려난 경위까지 쏟아져 나왔다. 이 발언은 선대 회장에게서 이건희 회장으로 경영권이 승계된 과정을 둘러싼 논란을 증폭시켰다. 이건희 회장은 “이맹희씨는 30년 전 나를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던 양반이어서 우리 집에서 퇴출당했다”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이맹희씨와 이창희씨는 지난 1969년 말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사직 당국에서 조사하라는 천륜에 어긋나는 문서를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라고 말했다. 이 투서에는 ‘100만 달러 해외 밀반출,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탈세, 현충사 조경 공사 비용 과다 책정’을 비롯해 여섯 가지 비리가 담겨 있었다. 이맹희씨가 이건희 회장을 30년 전 군대에 고소했다는 주장은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관계자마저 “당시 군사 정권이 집권할 때라서 이맹희씨가 사직 당국에 고발한 것을 군대라고 말한 듯하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은 방위병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정상적으로 마쳤다.    

이맹희씨는 ‘청와대 투서 사건은 창희씨 단독 범행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맹희씨는 1993년 출판한 저서 <묻어둔 이야기>에서 ‘창희는 내가 해외 출장으로 회사를 비울 때면 자신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회사 일을 직접 챙기던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다. 이에 창희 주변 인사 3인이 창희를 부추기자 일을 벌인 것이다. 맹세코 나는 이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투서를 입수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한 청와대 인사들이 이맹희씨 절친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투서 문건을 가장 먼저 입수한 이는 전두환 중령이었다. 전두환 중령은 당시 청와대 경호를 맡았던 ‘5·16부대’ 대대장이었다. 전두환 중령은 이맹희씨와 경북중학교 동창이었다.

삼성그룹 모태인 삼성상회(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소재) 앞에는 개천이 흘렀다. 그 개천 너머에는 빈민촌이 자리 잡았다. 이맹희씨는 개촌 너머에 사는 아이 전두환과 어울렸다. 죽마고우는 이맹희씨가 삼성 총수로, 전두환씨가 군부 실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허물없이 어울렸다. 그렇다 보니 이병철 회장은 이맹희씨가 투서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판단할 만하다. 더욱이 이맹희씨는 전두환 중령에게 투서를 넘겨받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한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정치권력을 동원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경영권을 찬탈하려 한 투서 사건의 주연이 누구인지 자명하다”라고 말했다. 이맹희씨는 “청와대에서 이 문서를 만진 사람도 대부분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그 무렵에는 어느 정도 청와대와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던 터라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묵인은 했으리라 (아버지가) 생각했던 듯하다”라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자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삼남 건희가 방위병으로 입대할 때도 장남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 사건 탓에 이창희씨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귀국하지 마라’라는 아버지 지시에 따라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에 언급된 기록

부자 관계가 이 지경으로까지 나빠진 계기는 한국비료(한비) 밀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한비 밀수 사건은 이병철 회장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지난 1965년 9월 일본 미쓰이물산과 협상해 차관 4천2백만 달러를 도입해 비료 공장을 설립하고자 했다. 미쓰이물산으로부터 공장 설립에 소요되는 설비와 기계류를 매입하자 미쓰이물산은 삼성에 리베이트 100만 달러를 제공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터라 10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을 한국으로 송금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일본에서 100만 달러로 건설 장비나 소비재를 구입하고 국내에 밀반입했다. 이에 따른 수입 30% 이상을 청와대에 정치 자금으로 건네는 조건으로 청와대와 사전 합의를 끝냈다. 밀수 품목 가운데 OTSA가 포함되었다. OTSA는 빵이나 과자에 집어넣어 단맛을 내는 사카린의 원료이다. 1966년 5월 일본 신슈우마루 호에 실려 울산에 OTSA 2천4백 부대가 부려졌다. 이 OTSA가 세관에서 빠져나오다 걸렸다. 국내외 언론이 3개월 동안 ‘삼성이 밀수를 주도했다’고 맹폭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치닫자 청와대마저 등을 돌렸다. 이 탓에 밀수를 주도한 혐의로 이창희 당시 한국비료 상무가 구속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1966년 10월22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해 국가에 헌납하고 나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라고 발표했다. 그 이듬해 이맹희씨는 36세에 삼성그룹 총수에 올랐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 본관에 출근해 경영 현황에 대해 보고받았지만,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69년 청와대 투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쿠데타는 무산되었다. 창희씨는 미국으로 떠나야 했고, 맹희씨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은 경영 복귀를 꾀했다. 차근차근 준비하다가 1973년 이맹희씨가 지닌 계열사 임원 직함 17개 가운데 삼성물산·삼성전자·제일제당 부사장 직함 3개만 남기고 모두 회수했다. 이맹희씨는 이 조처에 반발해 일본으로 떠났다. 1975년 봄 회사에 복귀했으나 의사 결정에서 배제되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이맹희씨는 노골적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고향인 경남 의령과 의성, 대구, 부산, 서울을 오가며 겨울에는 사냥, 여름에는 승마에 빠져들었다. 이창희씨는 1977년 귀국해 아버지와 화해했다. 하지만 이맹희씨는 여전히 부산에 칩거하며 낮에는 골프, 밤에는 독서에 빠졌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맨 처음에는 주변 권고도 있고 본인의 희망도 있어서 장남 맹희에게 맡겨보았다. 그랬더니 좋은 업적이 안 나오고 본인 스스로도 정상의 자리를 단념하면서 유능한 경영자를 찾아야겠다는 것을 자청했다”라고 밝혔다. 삼성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이와 같은 공식 언급과 별도로 이맹희씨의 불 같은 성격이 조직을 이끌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의문시했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병철 회장은 1976년 9월 일본 위암 전문의 가지타니 박사에게 위암 수술을 받기 위해 출국하기 직전  경기도 용인의 거처에서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부인 박두을 여사, 맹희씨 부부, 장녀 인희씨, 5녀 명희씨, 장손 재현씨가 참석했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해외 출장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이병철 회장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라고 선언했다. 형제 사이에 삼성 주식을 나누는 방식까지 지시했다. 이맹희씨는 이 유언에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내가’라고 생각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운명하기 직전에 가족과 절친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참석한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재확인했다.

그 뒤로 이맹희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족과 떨어져 외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이 임종을 앞둔 1987년 9월에야 이맹희씨는 한남동 집에 나타나 임종을 지켰다. 이맹희씨는 “첫날 인사드릴 때 말씀은 없어도 얼굴 가득히 밝은 표정을 짓던 (아버지) 얼굴을 잊지 못한다. 무려 15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미소였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때 그 따뜻한 미소가 나를 용서하는 신호라고 믿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병철 회장은 당시 임종을 두 달 앞둔 터라 큰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장례가 끝나자 이맹희씨는 다시 외국으로 떠나 타국 생활을 전전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이러지만 나를 포함해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그 사람이 제사에 나와서 제사 지내는 꼴을 못 봤다”라고 말했다. 이에 CJ주식회사 관계자는 “이맹희씨는 자기 존재 자체가 동생 건희에게 부담이라고 생각해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외유 생활을 했다. 이제 와서 가족 일에 거리를 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 이맹희씨를 대신해 아들 재현이 장손으로서 할머니인 고 박두을 여사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지금까지 아버지를 대신해 조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제사에는 삼성 인사도 참석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숙희씨가 밝힌 소송 참여 이유는?

이맹희씨는 누이동생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이맹희씨는 “(명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었고, 늘 따뜻한 마음으로 오빠인 나를 감싸주었다. 아버지가 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 마지막까지 내 편을 들어서 아버지를 설득하려 한 것도 명희였다”라고 밝혔다. 오빠와 함께 상속 재산 청구 소송에 참여한 숙희씨도 “삼성에서 큰오빠에게 심하게 한다. 능력이 없다고 무시하고…”라고 소송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숙희씨는 이맹희씨와 절친한 구자학씨와 결혼했다. 맹희씨와 숙희씨 부부는 함께 미국 유학을 간 적도 있다.

숙희씨의 남편 구자학씨는 금성사(LG그룹 전신)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이병철 회장과 구인회 회장은 양가 자녀를 일찌감치 배필로 점지할 정도로 절친이었다. 그러나 삼성이 전자 산업에 진출하면서 두 창업주 사이가 어색해졌다. 이맹희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버지(이병철 회장)와 구인회 회장, 내가 안양골프장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구사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하려고 하네’라고 하자 구회장은 벌컥 화를 내며 ‘(이윤이) 남으니깐 하려고 하지’라고 쏘아붙였다. 그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두 분이 이 일로 아주 서먹해졌다.” 당시 삼성에서 근무하던 구자학씨는 금성사로 복귀했다. 숙희씨는 친정과 시집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했다. 이건희 회장은 “숙희는 결혼 전에 아주 애녀(愛女)였다. 금성사로 시집가더니 전자 동업을 한다고 시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다. 우리 집에 와서 떼를 쓰고 보통 정신을 가지고 떠드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에 (아버지가 말하기를) 숙희 내 딸이 이럴 수 있느냐, 네가 그렇게 삼성전자가 경계되면 삼성 주식을 한 장도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숙희씨는 유산 상속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구자학씨는 급식업체 아워홈을 설립해 LG그룹에서 독립했다.

이제 형제자매 사이에는 법률 다툼밖에 남지 않았다. 감정 싸움과 달리 민사 소송은 쉽게 가열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루어진다. 재판 절차에 따라 준비 서면이 제출되고 서면 공방에 이어 변론 심리가 잇달아 진행된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지 모른다. 법무법인 세종 소속 윤재윤 변호사는 “민사 소송 특성상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 힘들다. 바둑으로 따지면 이제 포석 단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세종은 지난 4월27일 준비 서면을 제출했다. 

“(소송 제기에 대해) 뭐 내가 그렇게 섭섭하다는 느낌은. 상대가 안 되죠. (소송인이) 수준 이하의 자연인이니까 상대가 안 되죠.”
“앞으로는 무응답이고, 자기네들이 고소를 하면 끝까지 고소를 하고,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라도 가고, 내 지금 생각 같아서는 한 푼도 내 줄 생각이 없어요.”
“선대 회장(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 때 벌써 재산 분할이 끝나서 각자 돈을 다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CJ도 갖고 있고. 그런데 삼성이 너무 크다 보니까 욕심이 좀 나는 것이다.” 4월23일 법무법인 화우 통해 밝힌 음성 파일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나는 삼성가의 장자로서 삼성이 더욱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근데 최근에 건희가 어린애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앞으로 삼성을 누가 끌고 나갈 건지 걱정이 됩니다. 건희는 현재까지 형제지간에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늘 자기 욕심만 챙겨왔습니다. 한 푼도 안 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한 겁니다. 최근에야 건희가 숨겨왔던 그 엄청난 차명 재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게 헌법재판소까지 갈 일입니까. 이 소송은 내 뜻이고 내 의지입니다. 나는 삼성을 노리고 이런 소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을 밝혀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내 목적입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숙희

“왜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 때 다 분재되었다’는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25년간 숨겨왔던 내 재산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4월24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여러분이 이맹희씨와 나를 일대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큰 오산이오.”
“그 양반은 30년 전에 나를 군대에 고소를 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을 했던 양반이라서. 우리 집에서는 퇴출당한 양반이에요.”
 “그래서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이러지만 나를 포함에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그 사람이 제사에 나와서 제사 지내는 꼴을 내가 못 봤어요.”
“이숙희씨는 결혼 전에는 아주 애녀였다고.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는 그 시절에 금성사지. 그리로 시집을 가더니 같은 전자 동업을 한다고 그쪽 시집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떼를 쓰고 영 보통 정신 가지고 떠드는 정도가 아니었다고. 숙희 내 딸이 이럴 수 있느냐. 니가 그렇게 삼성전자가 경계가 된다면 삼성의 주식은 한 장도 줄 수 없다. (아버지가) 20여 년 전에 그때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아버지가)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 하고 제낀 자식이요.”
“이맹희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안 된다. 날 쳐다보지도 못했던 양반이다. 지금도 아마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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