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봉 두른 5천만원, ‘진짜 몸통’ 열쇠 될까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2.04.10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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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뜨거운 공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민간인 사찰 사건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에는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증거 인멸을 위한 입막음조로 건네진 5천만원의 실제 사진까지 공개되었다. 이 지폐 뭉치는 ‘관봉’으로 묶여 있었다. 이제 관심은 돈의 출처로 쏠리고 있다. 누가 어떻게 마련했는지가 의문의 핵심이다. 5천만원의 출처가 밝혀지면 진짜 몸통의 윤곽도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이명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관봉권 5천만원’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왼쪽) ⓒ 오마이뉴스제공(동그라미 안)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오른쪽)이 촬영한 5천만원 지폐 사진(왼쪽)이 공개되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4·11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연일 폭로전을 펼치는 가운데 새누리당은 ‘특검 도입’을, 민주통합당은 ‘청문회 실시’를 각각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반격 카드를 준비하고 있다는 전언도 들린다. 사정 당국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출범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으로 여권이 수세에 몰리자, 청와대가 참여정부 시절의 불법 사찰 사례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총선 이후에도 ‘불법 사찰 정국’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수사의 본류는 불법 사찰과 증거 인멸 의혹이다”라며,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지난 4월3일에는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과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을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이런 가운데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증거 인멸을 위한 입막음조로 지난해 4월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을 통해 건네진 5천만원이 관봉(官封) 형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관봉권’은 한국조폐공사에서 한국은행에 납품한 형태 그대로의 돈뭉치이다. 시중에서 전혀 유통되지 않았던 빳빳한 신권인 셈이다.

장 전 주무관이 사진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관봉권은 5만원권 100장씩을 묶은 돈뭉치 10다발을 비닐로 압축 포장한 형태였다. 관봉권의 띠지에는 ‘품명: 한국은행 5만원권, 기호: 00272, 수량: 1,000장, 포장 번호: 0404’라고 표기되어 있다. 특히 지폐에는 ‘CJ0372001B’부터 ‘CJ0373000B’까지 일련번호가 찍혀 있다.

그동안 장 전 주무관이 입막음용으로 받은 총 1억1천만원은 전액 현금이라 그 출처를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5천만원은 관봉 형태로 일련번호까지 찍혀 있기 때문에 이 자금의 출처를 추적하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검찰 입장에서는 불법 사찰과 증거 인멸 등을 지시한 ‘윗선’ 혹은 ‘진짜 몸통’을 규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단서를 확보한 것이다.

‘관봉 돈다발’ 사진이 나오면서, 장 전 주무관에게 돈을 전달한 류충렬 전 공직복무관리관이 했던 “장 전 주무관을 위해 직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이었다”라는 해명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기자는 류 전 복무관의 입장을 듣고자, 그의 휴대전화로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았다.

관봉 돈 사진이 나오면서, 관심은 5천만원의 출처로 쏠린다. 처음 누구의 지시로 5천만원이 마련되었고, 누가(혹은 세력) 그 돈을 마련했으며, 누구의 손을 거쳐 류 전 복무관을 통해 장 전 주무관에게 전달되었는지가 핵심 의문이다.

특수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의 한 관계자는 “장 전 주무관의 돈 사진이 공개되기 전까지 ‘관봉’이라는 말조차 거의 듣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특수 수사를 했던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 역시 “그동안 수사하면서 관봉 형태의 돈다발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관봉 형태로 돈다발이 시중에 유통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류 전 관리관이 장 전 주무관에게 전달한 돈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핵심은 역시 돈의 출처이다. 출처가 드러나면, 불법 사찰과 증거 인멸의 ‘몸통’이 누구인지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이 열리는 셈이다.

‘민간인 불법 사찰’ 증거 인멸 혐의와 관련한 영장 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두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왼쪽/ ⓒ 시사저널 임준선 )과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오른쪽/ ⓒ 시사저널 임준선).

정말 국세청 간부가 돈 만들어 건넸나

5천만원의 출처와 관련해서는 여러 관측이 쏟아지고 있다. 관봉권을 보관하고 있는 정부 부처의 예비비나 ‘힘 있는 기관들’의 특수 활동비, 대기업이나 정권 실세의 비자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돈의 출처로 강한 의심을 받고 있는 곳은 국세청이다. ‘장진수의 돈’이 불거졌던 지난 3월20일 서울신문은 ‘사정 당국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국세청 간부가 지난해 1월 출처 불명의 돈 5천만원을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전달했고, 이 돈이 장 전 주무관에게 건네진 것으로 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국세청은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관봉권이 등장한 후 기자가 접촉했던 사정 당국의 한 간부는 국세청 내부에서 나도는 제법 구체적인 ‘설’을 귀띔했다. 이 간부는 “청와대가 지난해 초 국세청에 장 전 주무관의 돈 문제를 얘기했고, 국세청에서는 ‘지방의 한 국세청장’을 통해 ‘한 대기업’에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이 대기업이 5천만원을 마련했고, 이 돈이 류 전 복무관을 거쳐 장 전 주무관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한때 국세청이 기업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마련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 적도 없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기자는 협조 요청을 했다는 ‘지방의 한 국세청장’의 입장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전화 연락을 취했으나, 4월6일 현재까지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해당 대기업의 한 임원은 “절대 그런 사실이 없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일각에서는 시중 은행이나 은행 지점 등에도 관봉권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고객이 자금의 출처일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서울 강남 지역에 위치한 시중 은행 지점의 한 간부는 전화 통화에서 “강남 지역에서도 2천만원 이상 거액을 한꺼번에 관봉권이나 일반 지폐로 인출해가는 고객은 하루에 한 명 정도로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5천만원을 인출해갔다면, 그 고객을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다만, ‘조폐공사→한국은행→은행 본점→은행 지점’까지 현금을 수송하는 과정에서는 일련번호를 전산 기록해두지만, ‘은행 지점→고객’에게 전달될 때는 기록을 남기지 않아 추적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럴 경우 2천만원 이상 금융 거래를 할 때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장 전 주무관이 돈을 받았던 시기에 5천만원을 인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면 추적이 가능하다는 것이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검찰의 수사 방향은 크게 두 갈래이다. 우선 한국은행 등에서 일련번호가 찍힌 관봉권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그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검찰은 조만간 류 전 관리관을 소환해 자금 출처를 추궁할 것으로 전해졌다. 동시에 당시 거액의 현금 인출과 관련한 정보를 FIU에 문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4월5일 “수사팀에서도 관봉권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 전 주무관의 돈에 일련번호가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그 출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수사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검찰 수사를 통해 ‘관봉 5천만원’의 출처가 밝혀지면 ‘몸통’의 윤곽도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이명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 이미 야권뿐 아니라 이상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등 일부 여권에서도 “이대통령이 불법 사찰에 책임질 일이 있다면 ‘하야’해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까지 나온 마당이다.

과연 ‘관봉 5천만원’은 ‘하야 정국’으로 이어질 핵 폭탄급 뇌관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의혹만 남긴 채 흐지부지 끝날 불발탄인가. 검찰이 늑장 수사를 한다며 곱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어 이 사건은 총선 이후에도 정국의 화약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근무했던 김기현 경정의 USB에 담긴 ‘총리실 문건’. ⓒ 시사저널 유장훈
‘공정 방송 쟁취’와 ‘김인규 사장 퇴진’을 주장하며 파업을 벌이고 있는 KBS 새노조(이하 새노조)가 지난 3월30일 인터넷 ‘리셋  KBS 뉴스9’를 통해 공개했던 ‘총리실 불법 사찰 문건’의 분량은 실로 방대하다. <시사저널>이 이동식 저장 장치(USB)에 담겨 있던 사찰 문건 파일을 입수해, 직접 인쇄해보니 A4용지로만 무려 1만장을 훌쩍 넘었다.

KBS 새노조는 “사찰 문건이 2천6백19건이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본지 분석 결과, USB 파일에 담긴 문건들 가운데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따라서 KBS 새노조가 주장한 문건의 개수보다는 적은 것으로 파악된다.

KBS 새노조가 처음 이 문건의 일부를 공개하자, 청와대는 “공개된 2천6백여 건 가운데 80%(2천2백여 건)는 참여정부 시절 수집한 사찰 문건이다”라며 반격했다. 본지가 분석해보니, 청와대의 주장 가운데 참여정부 시절 문건이 80% 정도 된다는 것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불법 사찰 문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참여정부 당시 경찰청 감찰담당관실 등이 작성한 문건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경찰 간부들의 인사 관련 자료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민간인 불법 사찰과 관련된 문건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참여정부의 문건은 경찰 자료였다는 것이다. 경찰은 사찰 문건이 담긴 USB의 주인인 김기현 경정이 경찰청 감찰담당관실에서 근무하던 2005년 2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작성된 2천2백여 건의 문건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4월4일 “김경장이 검찰이 압수한 USB 2개에 대해 ‘2005년부터 경찰청 감찰담당관실에서 썼던 것이 맞지만 당시 저장된 자료는 경찰의 비위 사실에 대한 감찰 보고서’라고 진술했다”라고 밝혔다. 청와대의 주장처럼 참여정부 시절의 불법 사찰 문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민간인 불법 사찰 등이 담긴 문건들은 2008년 7월 출범한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현 정부 들어 작성된 문건들에서는 이미 알려진 대로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 등에 대한 불법 사찰뿐 아니라 ‘KBS, YTN, MBC 임원진 교체 방향 보고’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관련’ ‘인터넷 VIP(대통령) 비방 글’ 및 ‘○○산부인과’(2008년 하명 사건 처리부) 등 합법적인 감찰 활동으로 보기에 어려운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문건의 상당량은 참여정부 때 작성되었지만, 정작 불법성 여부를 따져야 할 문건은 이명박 정부에서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공직윤리지원관실 1팀 소속이었던 김기현 경정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USB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7월부터 7개 팀, 40명으로 출범한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그동안 합법 감찰이나 불법 사찰을 얼마나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큰 파문을 몰고 온 ‘김기현 경정 USB’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작성했던 전체 문건 가운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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