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의 두 번째 승부수, 무얼 노리나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2.04.10 01: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K그룹, 일본 엘피다 입찰 제안서 전격 제출… 하이닉스 인수 4개월 만이라 내부에서도 ‘술렁’

하이닉스 청주 공장을 방문한 최태원 SK그룹 회장(맨 왼쪽). ⓒ SK 제공

“그룹의 웬만한 임원들은 엘피다 인수전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도 나중에 언론 발표를 보고 알았다.” 기자가 최근 만난 SK그룹 간부의 말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말 일본 D램 제조업체인 엘피다를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입찰 제안서 제출 마감일에 관련 사실을 공개할 정도로 인수전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SK그룹은 지난해 11월 하이닉스의 인수를 확정지었다. PMI(인수 후 통합) 작업에 여념이 없을 시기였다. 그럼에도 ‘파산 보호’를 신청한 일본의 엘피다를 추가로 인수하겠다고 나서면서 내부적으로 술렁임이 적지 않았다.

인수 성공하면 삼성전자와 양강 체제 될 수도

그룹의 한 관계자는 “엘피다는 전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의 17%를 점유하고 있다. 하이닉스에 이어 엘피다까지 인수하게 되면 삼성전자에 이어 확고한 2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시장 조사업체인 IHS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D램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42.2%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가 23%, 엘피다가 13.1%로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두 기업이 합쳐질 경우 삼성전자를 바짝 추격할 뿐 아니라 생산 원가까지 줄일 수 있어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또다시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고 있다. 강력한 오너십을 바탕으로 엘피다까지 인수해 삼성전자를 추격할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로 비치고 있다. 최회장은 이미 SK하이닉스에 대한 오너십을 상당 부분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최회장은 지난 2월 SK하이닉스에 대한 인수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지방이나 해외 사업장과 공장을 방문하면서 분위기를 다잡았다. 그에 따른 일화도 있다. 최회장은 지난해 말 하이닉스를 인수하고 이천 공장을 방문했다. 통보를 받은 이천 공장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최회장이 방문한다는 말에 긴급히 ‘박수 부대’가 동원되었다. 박수를 할 때는 반드시 일렬로 서서 웃음을 지으라는 지침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회장이 움직이는 동선에는 어김없이 ‘밀대 부대’가 눈에 띄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회사 관계자는 “채권단이 경영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회사에 오너가 생기면서 내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라고 귀띔했다.

성사 힘들어 ‘경쟁사 압박용’이라는 분석도

SK그룹측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라면서 조심스런 분위기이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내부 방침에 따라 인수전에 참가하지만,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사 결과에 따라 상황이 또다시 바뀔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도 지난 3월26일 열린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삼성전자와는 시장 점유율 격차도 나고, 주력하는 분야도 달라 경쟁 상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증시 전문가들 역시 SK그룹이 인수할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김형식 토러스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공적 자금이 들어간 엘피다를 일본 외의 업체에 매각할 경우 여론의 압박을 받을 수 있다. SK하이닉스가 인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엘피다는 한국 업체를 견제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에 밀리던 NEC와 히타치가 1999년 합작해 만든 회사가 엘피다이다. 지난 2002년에는 미쓰비시도 합류했다. 엘피다가 지난 3월 ‘파산 보호’를 신청하기는 했지만, 한국 업체에 넘기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자금 여력 역시 크지 않다. SK하이닉스는 7조원 정도의 현금 여력이 있다. 올해 투자 예정 금액인 4조2천억원을 제외해도 엘피다를 인수할 실탄은 충분하다. 하지만 엘피다는 현재 6조원대의 차입금을 가지고 있어 SK가 인수할 경우 유동성 압박에 처할 수도 있다. SK그룹 내부에서조차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이다. 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를 실사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부실이 일부 발견된 것으로 알고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할 때 인수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SK하이닉스가 엘피다의 인수전에 참여하면서 재계 안팎에서는 궁금증이 확산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경쟁사 견제용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한다. 미국 마이크론은 지난 2002년 4월에 하이닉스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후 실사 과정에서 하이닉스의 D램 기술과 영업 노하우가 대거 마이크론에 노출되었다. 이번에 하이닉스가 엘피다 인수전에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로 풀이되고 있다. 김형식 토러스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실사에 참여하면서 경쟁사를 벤치마킹할 수 있다. 덤으로 입찰 경쟁을 가열시켜 경쟁사에 헐값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부수 효과까지도 기대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수 경쟁사인 마이크론의 스티브 애플턴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이 최근 경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도 변수로 거론된다. SK하이닉스는 그동안 엘피다의 인수전 참가 사실을 꼭꼭 감춰왔다. 이에 반해 마이크론은 엘피다와 자본 및 업무 제휴를 추진하는 등 공공연하게 인수 참여를 추진해왔다. 그동안 공격적인 M&A(인수·합병)를 지휘하던 스티브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인수 구도 역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시장에서는 보고 있다. 마이크론과 함께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일본 기업도 마찬가지다. 1차 입찰에 제안서를 제출한 일본 기업으로는 도시바가 유일하다. 하지만 도시바 역시 엘피다 인수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보니 하이닉스의 공동 인수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SK가 이같은 허점을 공략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시장 일각의 해석이다. 오영보 한맥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엘피다를 어떤 기업이 인수할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다. 다만 엘피다의 존속과 관련된 잡음이 들리는 것은 신뢰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수의 성사 여부를 떠나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하이닉스에게는 호재가 될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