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항우·유방의 ‘화장품 초한지’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2.03.1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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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고가품·원브랜드샵 시장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해외에서도 경쟁 치열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국내 화장품 시장은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이 양분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시장 점유율 36~38%로 국내 화장품 시장의 ‘지존’이다. LG생활건강이 시장 점유율 20% 안팎을 차지하며 아모레퍼시픽을 뒤쫓고 있다. 에이블씨엔씨가 원브랜드샵 미샤를 내세워 3위에 올랐으나 매출이나 시장 점유율 면에서 선두 업체에 크게 못 미친다. 아모레퍼시픽은 고가 화장품을 취급하는 백화점이나 방문 판매 부문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선두이다. LG생활건강은 고가품 시장에서는 열세이나 전문점이나 할인점 영역에서는 아모레퍼시픽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원브랜드샵 시장에서는 LG생활건강의 더페이스샵이 아모레퍼시픽의 이니스프리나 에뛰드보다 앞선다.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도 치열하게 경쟁한다. 아모레퍼시픽은 ‘성장 시장’ 중국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LG생활건강은 세계 2위 화장품 시장인 일본에 먼저 발을 내딛었다.

아모레퍼시픽, 미백 기능에 중점 둬

아모레퍼시픽을 이끄는 인물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49)이다. 서사장은 태평양(아모레퍼시픽 전신) 창업주인 서성환 회장의 차남이다. 42세에 대표이사에 올랐다. 경영 역량이나 배짱 면에서 서사장에 견줄 만한 경영자는 국내 화장품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서사장은 꼼꼼하면서도 추진력이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1993년 태평양그룹(현 아모레퍼시픽) 기획조정실 사장으로 있을 때 서사장의 완력은 그룹 경영진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24개 계열사 중 9개만 남기고 모두 팔아버린 것이다.

서사장은 지난 1997년 대표이사에 취임하면서 해마다 화장품 브랜드를 발표했다. 라네즈, 아이오페, 헤라, 설화수까지 출시하는 브랜드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난 1997년 취임 당시 매출이 6천9백억원에 불과했다. 지난해 매출(잠정 실적)은 2조5천5백47억원까지 늘어났다. 그동안 지주회사가 분리되고 회계 처리 방식으로 국제 회계 기준이 도입되어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서사장의 재임 기간 회사 규모가 네 배 이상 커졌다.  

아모레퍼시픽은 국내 화장품 시장을 평정하고 나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아침마다 사내 방송에 중국어 강좌가 나온다. 중국 매출액은 지난해 1천9백억원이 넘는다. 올해 중국 매출은 30% 이상 성장해 2천5백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화장품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8%에 불과하다. 아시아 전역에 불고 있는 한류 바람이 가세하면서 아모레퍼시픽은 명품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 매출이 총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9% 안팎이다. 중국 내 시장 점유율도 1% 안팎이다. 성장 잠재력이 무한하다.

아모레퍼시픽은 아시아 시장에서는 유럽이나 미국 화장품 업체와 겨룰 만하다고 판단한다. 아시아 여성은 백인과 달리 미백에 관심이 많다. 이에 따라 아시아 화장품업체는 미백 기능을 중시하는 제품을 중점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화장품 업체는 아시아 여성의 피부색에 맞는 화장품을 만들기에 불리하다. 주 소비자인 백인 여성은 미백에 관심이 없는 탓이다. 이로 인해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시세이도 외에는 아모레퍼시픽의 경쟁자가 거의 없다.  

아모레퍼시픽이 글로벌 화장품업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CEO 리스크’이다. 이 아무개 전 아모레퍼시픽 직원은 “서사장은 초패왕 항우에 비견할 수 있다. 전략 기획 역량이나 업무 처리 능력은 업계 최고이지만, 인력 관리에 미흡한 면이 있다. 항우가 재주와 기개는 탁월하지만 한신이나 진평 같은 인재를 놓친 것처럼 서사장도 회사를 성장시킨 주역들이 잇달아 회사를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희선 전 아모레퍼시픽 상무는 얼마 전 경쟁사인 KT&G로 자리를 옮겼다. 김상무는 라네즈·이니스프리·아이오페 브랜드를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화장품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렸다. 홍보와 마케팅 담당 임원도 줄줄이 퇴사했다. 전 아모레퍼시픽 임원은 “서사장은 역량이나 열정 면에서 자기보다 뒤떨어지는 임원에게는 거친 언사를 내뱉는다. 디자인, 연구·개발(R&D), 마케팅 부서에 인재가 많지만 이직이 잦다. 아모레퍼시픽은 교육·훈련 체계를 잘 갖추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인사가 전직해서 다른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화장품업계에서 서사장과 견줄 만한 인물이 있다면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59)이 유일하다. 차부회장은 외부 영입 인사 가운데 유일하게 LG의 핵심 계열사 대표에 오른 인물이다. 차부회장은 지난 2005년 대표이사에 취임해 28분기 연속 두 자릿수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성장률을 거두었다. 그 사이 매출과 영업 이익은 각각 세 배와 다섯 배 커졌고 주가는 15배 올랐다. 차부회장은 최근 실적에서 서사장을 앞선다. 미국 경제 정보 매체 블룸버그는 ‘올해 아모레퍼시픽은 9.2%, LG생활건강은 14.3%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차부회장은 서사장의 미국 코넬 대학 MBA(경영학 석사 과정) 동문이기도 하다. 차부회장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주립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 프록터앤갬블(P&G)에 입사해 지난 1999년 미국 프록터앤갬블 한국 총괄사장에 올랐다. 당시 프록터앤갬블은 LG생활건강을 인수하려 했다. 차부회장은 실사팀 자격으로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만났다. 당시 구본무 회장은 차부회장의 업무 처리 능력에 반했다고 한다. 이때의 인연으로 차부회장은 해태제과 사장을 거쳐 2004년 LG생활건강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LG생활건강, 일본 업체 인수해 전력 강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
차부회장은 아우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받는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인수·합병(M&A)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자칫 실패하기 쉬운 것이 M&A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서사장이 항우라면 차부회장은 유방이라고 말한다. 경쟁 업체마저 끌어들이고 인재를 흡수해 자기 전력을 강화하는 전략이 유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차부회장은 화장품 브랜드숍 더페이스샵과 색조 화장품 보브를 인수해 사업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3월 일본 화장품업체 긴자 스테파니까지 인수하며 일본 시장을 넘보고 있다. 차부회장은 생활용품에 제한되었던 LG생활건강의 사업 부문을 화장품이나 음료까지 확장했다. 기초 화장품 오휘, 숨, 빌리프를 잇달아 출시해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차부회장은 미국식의 합리적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정시 퇴근제와 유연 근무제를 채택했다. 사무실 불까지 꺼가며 늦게 일하는 직원을 내쫓는다. 김 아무개 전 LG생활건강 직원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때문인지 차부회장의 리더십은 합리적이다. 다만 한국인의 정을 느낄 수 없다. 업적 평가나 인사에 냉정한 것으로 유명하다”라고 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지난 3월5일 색조 화장품 브랜드 ‘비디비치’를 인수했다. 신세계그룹의 자본과 유통망을 감안하면 신세계인터내셔날이 화장품 시장의 양강 체제를 뒤흔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업계 평가는 이와 다르다. 김혜림 현대증권 연구원은 “신세계인터내셔날의 비디비치 인수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약하다. 앞으로 화장품업계의 M&A 양상을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시장 구도를 흔들 만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3위 업체 에이블씨엔씨를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판도 변화는 없다. 에이블씨엔씨의 매출은 3천억원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에이블씨엔씨 대주주가 지분을 팔 의향이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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