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인생들, ‘나쁜 의사’에게 꽂히다
  • 하재근│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1.12.1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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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드라마 <브레인>의 주인공에게 공감 넘어 열광까지 하는 이유

KBS 드라마 신하균
KBS 월화드라마 <브레인>이 조용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 시청률은 10%대 초반이지만, 그런 시청률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팬덤 현상이 인터넷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연인 신하균의 이름을 빗대 ‘하균하균’ ‘하균앓이’ 같은 신조어도 나타났다. 일부 팬은 월요일과 화요일을 ‘브요일’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이다.

의사 포털 ‘닥플’이 지난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의학 드라마 속에서 가장 의사 같은 연기자’를 뽑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었다. 결과는 <하얀거탑>의 김명민이 47% 지지로 1위였다. 이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하얀거탑>은 한국 드라마가 이룩한 금자탑 가운데 하나이다. 그 작품의 주연이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당연하다. 놀라운 것은 2위였다. 바로 <브레인>의 신하균이 33% 지지로 2위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수많은 의학 드라마 중에서 <브레인>이 그토록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것을 단지 배우 개인의 연기력 차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웬만한 의학 드라마 주연의 연기력은 대부분 비슷한 수준이었다. 작품의 임팩트가 강하기 때문에 배우도 빛이 났다고 보아야 한다.

인터넷상의 반응으로만 보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뿌리 깊은 나무>이고, 그 다음이 <브레인>이다. 월화의 넷심은 <브레인> 쪽으로 기울고, 수목의 넷심은 <뿌리 깊은 나무>가 장악한 셈이다. 네티즌은 <브레인>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 작품의 초반은 ‘나쁜 의사’ 신하균이 출세를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후배들 위에서 권위적으로 군림하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오만으로 남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을 승진시켜줄 신경외과 과장에게만 충성하는 캐릭터였다. 네티즌은 바로 그런 캐릭터에게 꽂혔다. 처음 1, 2회 방영 당시 신하균의 그런 모습만 나왔을 때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수많은 의학 드라마에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라고만 여겼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3회부터였다.

‘88만원 세대’ 네티즌들의 화두와 맞아떨어져

출연자들. ⓒ KBS
3회부터 신하균의 눈물겨운 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실력으로 모두를 무시하며 신경외과 과장 밑에서 ‘1인 지하, 만인지상’의 탄탄한 지위를 누리는 것 같았던 신하균은, 알고 보니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과장 이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진영이 신하균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신하균이 무시했던 실력 미달의 동료는 알고 보니 그 병원 고참 의사의 자식이었다. 든든한 백을 가진 것이다. 신하균에게 조교수 자리를 줄 것 같았던 과장은 그 고참 의사와 술을 한잔 하더니, 그 실력 미달의 동료를 조교수로 임용했다.

논문까지 대신 써서 바쳐가며 충성했던 신하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실력은 그가 월등하지만 배경이 없는 신하균을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힘을 가진 모든 사람이 신하균에게 냉혹하다. 게다가 신하균은 집안마저도 어렵다. 어머니의 사채 빚을 자신이 대신 짊어져야 하는 신세이다. 사방에서 신하균의 목을 조여온다.

그가 출세를 위해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린 것은,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고, 자신의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노력해, 감히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쌓았다. 그 실력으로,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되려 했다. 평생 남에게 굽실거리며 사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그 상처 때문에 그는 자존심에 집착하고 출세만 아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전쟁을 치르듯이 분투를 이어간다. 이것이 ‘88만원 세대’ 네티즌에게 공감을 끌어냈다. 거대한 기득권 카르텔에 대항한 생존 투쟁이야말로 이 시대 청춘들의 화두가 아니던가! 이래서 시청률 수치와 상관없이, 네티즌의 뜨거운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하얀거탑>과도 비슷한 구도이다. <하얀거탑>도 어느 가진 것 없는 의사의 출세 분투기였다. 당시 네티즌들은 주인공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네티즌의 좌절감은 여전한 셈이다.

하지만 <브레인>은 아직 <하얀거탑>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못했다. <하얀거탑>의 경우는 주연인 김명민뿐만 아니라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과장을 비롯해, 병원장이라든가 그 외의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분명한 존재감을 보여주었었다. 그것이 작품의 박진감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브레인>은 아직 신하균의 원맨쇼이다. 신하균 이외에는 뚜렷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없다. 그에 따라 신하균의 분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게는 되는데, 그 이상의 박진감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주요 등장인물이 서로 눈을 마주보고 있기만 해도 모종의 힘이 느껴진다. 바로 그런 것이 작품의 박력이다. <브레인>에는 아직 그런 힘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네티즌들의 지지에도 인기가 폭넓게 상승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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