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 입고 다시 ‘사극 사랑’에 빠진 충무로
  • 이지강│영화평론가 ()
  • 승인 2011.11.2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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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탐정> <최종병기 활> 등 성공에 힘입어 대작들 제작 ‘한창’…이병헌·차태현 등 캐스팅도 제작 현장에 활기 더해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충무로가 사극에 빠졌다. 영화 제작자들은 한쪽에 고이 모셔두었던 사극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들고 있고, 진행 중인 작품의 덩치는 더욱 커지고 있다. 차태현이 주연을 맡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10월5일부터 한창 촬영 중이고, <후궁 : 제왕의 첩>도 11월3일 촬영에 들어갔다.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를 소재로 한 <가비>는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이 진행 중이며, 최근에는 월드스타로 발돋움한 이병헌이 차기작으로 <나는 조선의 왕이다>를 선택했다. 충무로의 사극 사랑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왕의 남자> 이후 충무로의 인기 메뉴로 등극했던 팩션 사극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현재 진행 중인 몇몇 작품들도 제작에 돌입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후궁 : 제왕의 첩>은 노출 수위가 문제였다. <혈의 누>로 사극 연출 실력을 인정받은 김대승 감독의 연출작임에도 주연 여배우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안 감독의 <색·계>를 넘어서는 노출 수위를 보여줄 것이라고 공언하는 작품에 여배우가 선뜻 참여를 선언하는 것이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방자전>을 통해 한 번 노출신을 경험한 조여정이 참여하면서 걸림돌이 사라졌다. <나는 조선의 왕이다> 역시 제작상 난제가 많았다. 이 작품은 충무로에서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로 유명세를 탔다. 강우석 감독이 연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그런데 제작사와의 갈등으로 강감독이 하차하게 되면서 기대감은 떨어지고 진행도 더디게 흘러갔다. 티켓 파워를 가지고 있는 이병헌의 캐스팅은 작품에 다시 한번 활력을 심어줄 것으로 보인다.

충무로의 사극 열풍은 올해 개봉한 사극 작품의 성공에 기인한다. <최종병기 활>은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규모를 자랑했지만, 개봉 전까지만 해도 흥행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다. 하지만 여름 성수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올 최대 흥행작의 자리에 올랐다. 올 초 개봉한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 역시 4백79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기대 이상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

작품의 성공과 함께 주연 배우의 위상도 달라졌다. 박해일은 <최종병기 활>을 통해 이미 인정받았던 연기력에 흥행성까지 입증해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김명민 역시 <조선명탐정…> 이후 충무로의 잇단 러브콜을 받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지아이조2>를 촬영하고 있는 이병헌이 복귀작으로 <나는 조선의 왕이다>를 선택한 것이나, 차태현이 첫 사극 도전에 나선 것은 제작자 못지않게 배우도 사극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장르와 상상력의 폭을 크게 확대시킨 사극들이 흥행 주도

과거 사극 열풍을 이끌었던 작품에서는 방대한 스케일과 화려한 액션에 기댄 남성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고증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 세트와 화려한 복색도 인기에 한몫했다. 하지만 이 공식에 충실했던 <불꽃처럼 나비처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사극은 좀 더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영화, 드라마를 막론하고 최근 흥행을 주도하고 있는 사극 작품은 장르와 상상력의 폭을 더욱 확대시킨 것들이다. 추격 스릴러, 추리극, 학원 로맨스, 정통 멜로 등 다양한 장르 안에서 현대적 감각을 입힌 과감한 연출을 시도하고 있다. 익숙함과 새로움의 결합이라 할 만하다. 상업 영화의 익숙한 장르적 틀을 가져오면서도 소재, 대사, 영상, 세트, 의상, 배경 음악 등에서는 신선함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최종병기 활>은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활이라는 소재를 제외하고는 사극의 색채를 최소화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단순하고 힘 있는 플롯과 속도감 있는 전개는 기존 사극보다는 <테이큰> <본> 시리즈 등이 보여준 현대적 액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조선명탐정…> 역시 기존 사극과는 달리 시트콤을 연상시키는 현대적 유머 코드를 동원해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 ⓒNEW 제공

새롭게 추진되고 있는 사극 프로젝트도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다. <나는 조선의 왕이다>는 ‘왕자와 거지’라는 익숙한 이야기를 변주한다. 광해군이라는 사극 단골 소재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새로움을 표현해낼지가 작품의 흥행 포인트이다. 대중을 만족시킬 만한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실패작으로 귀결될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금보다 귀했던 얼음을 훔치기 위해 벌이는 범죄 한판을 다룬 케이퍼 무비이다. 잘 짜인 케이퍼 무비의 파괴력은 <범죄의 재구성>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 등에서 검증된 바 있다. 차태현·성동일·고창석 등 개성 강한 배우가 만들어내는 캐릭터의 충돌과 조화가 기대된다. <후궁 : 제왕의 첩>은 두 작품에 비하면 정통 사극에 가깝다. 왕과 왕의 여자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제3의 인물 구도는 멜로 사극이 취해온 단골 소재이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이야기에 에로틱한 애정신이 어떻게 표현될지가 관건이다.

사극 열풍은 이제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추노>에서 <뿌리 깊은 나무>까지 명품 사극 드라마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고, 출판가에서도 이정명·김훈·김탁환·정은궐 등의 팩션 소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극장가의 사극 열풍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영화 속 역사 이야기가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경찰이 살해당하고 시신과 함께 대량의 필로폰이 발견된다. 즉시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박인무(성동일) 팀장 휘하의 강력반이 사건을 맡는다. 본청에서 내려왔다는 FBI 연수 경력의 범죄심리학자 호룡(주원)이 팀에 합류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우직한 형사 성범(엄태웅)은 엘리트 냄새 풀풀 나는 호룡을 경계한다. 그러나 제대로 신경전을 벌일 새도 없이 사건이 꼬리를 물고, 그 연결 고리에 또 다른 경찰 경식(김정태)이 있음이 밝혀진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윗선’과 연결된 범죄. <특수본>은 그렇게 사건의 실체를 향해 달려간다.

황병국 감독의 신작 <특수본>은 익숙한 범죄·형사물의 패턴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배우들의 몸 사리지 않는 액션, 사회적 맥락을 담은 이야기는 <부당거래> 또는 <공공의 적> 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돋보이는 조연진의 활약은 선행 장르 영화들이 코미디를 위해 흔히 쓰던 장치이고, 단순하지만 우직한 성범과 똑똑하지만 냉정한 호룡의 갈등은 형사 버디물에서 보던 설정이다. 이런 익숙함은 사실상 장르적 습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이므로, 영화 <특수본>이 품은 익숙함은 작은 변주를 통해 얼마든지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박진감 넘치는 초반의 추격 액션 장면이나 이름 석자를 각인하고도 남을 배우 조재윤의 활약, 사회적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배경 사건의 배치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본질적으로 사건과 갈등이 중심에 놓여야 할 드라마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빠르게만 진행되어 모처럼 공들인 장면과 설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범인의 정체는 특별한 단서 없이도 너무 쉽게 짐작이 가능하고, 죽어나간 사람 수에 비해 사건의 해결은 쉽기만 하다. 경찰 비리에 재개발 문제까지, 드러난 벽은 거대한데 그것을 넘어서려는 주인공의 노력과 접근은 지나치게 안일하다. 캐릭터가 게으르다 보니 간간이 튀어나오는 웅변조의 대사는 더욱 거슬린다. 결정적일 것까지는 없지만 한 편의 경찰 홍보 영화를 연상케 하는 결말 장면도 영화의 감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긴장감으로 숨이 막혀야 할 순간을 급체로 인한 호흡곤란이 대체한 기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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