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한국학 열풍’세계를 향해 불까
  • 미국 로스앤젤레스·성기영│자유기고가 ()
  • 승인 2011.11.0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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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등 학문적 행사 성황…소장 학자들 관심 늘어
▲ USC 주최 신진학자 워크숍은 미국 내 소장 한국학자들의 연구 역량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사진은 발표내용을 듣고 있는 청중들. ⓒ성기영 제공

지난 10월21일 오전 9시.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쪽에 있는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 USC) 캠퍼스의 한 대형 컨퍼런스홀. 토요일 이른 아침임에도 이 대학 한국학연구소(소장 데이비드 강)가 주최한 신진학자 능력 개발 워크숍에 학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라이징 스타 워크숍(Rising Star Workshop)’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학술회의는 미국에서 열리는 수많은 한국학 관련 행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멘토링 워크숍’이라는 별칭이 암시하듯 주로 미국 주요 대학에서 강의하는 조교수급 소장 학자들이 다양한 주제의 한국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해당 분야의 중견 학자들이 토론자로 참가해 구체적 비평을 통해 논문들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담금질’ 과정을 거쳐 이들 논문은 각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 저널에 발표되거나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될 예정이다. 따라서 이날 토론한 내용은 모두 미국 내 한국학 분야의 개별적 연구 성과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지난 2009년 USC 한국학연구소장으로 부임한 데이비드 강 소장의 아이디어를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받아들여 후원에 나서면서 시작된 이 신진학자 워크숍은 올해로 3년째를 맞는다. 원래 미국에서 활동하는 소장 정치학자들의 토론 모임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난해부터 역사·사회학·문화인류학 등 인접 분야 학문으로 범위를 넓혀왔다. 워크숍에 대한 소장 학자들의 관심이 점점 늘어나면서 올해부터는 행사 규모를 더욱 키워 이틀에 걸쳐 논문 14편이 발표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워크숍에는 모두 14편의 논문이 발표되는 등 유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성기영 제공

관점·분야 모두 지난해보다 다양해지고 풍성

올해에는 한국 영화와 현대 예술 분야 등을 다룬 젊은 학자들의 논문들이 발표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USC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최영민 교수(영화학)는 한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연계한 영화 체험 전시 프로그램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해 이날 참석한 인문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또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의 리사 김 데이비스 교수(지리학)는 경기도 안양시가 지난 몇 년간 추진해온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도시지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을 발표해 한국학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동대문 의류 시장의 노동 환경을 사회적 기업의 등장과 연계해 조사 분석한 인류학 분야 논문도 등장했다.

이 밖에도 역사학 분야에서는 한국인만이 가진 독특한 심리 증후군 중 하나인 ‘화병’을 의학사적으로 분석한 논문(다트머스 칼리지 서소영 교수)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 한·미 동맹의 전략적 신뢰 관계를 고찰한 논문(이화여대 레이프 에릭 이슬리 교수)까지 실로 다양한 주제의 논문이 발표되어 한국학 분야의 연구 주제가 점점 다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젊은 학자들이 역사와 전통문화 등 고정된 틀에 갇혀 있던 미국 내 한국학의 전통적 주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선보이는 데 대한 미국 학계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한국학 저널(Journal of Korean Studies)> 편집 책임자인 클라크 소렌슨 워싱턴 대학 인류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영화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라고 진단했다. 소렌슨 교수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동안 정치학 분야에서는 미국 학계에서 성장한 원로 학자들이 물러나면서 그 공백이 아직 완전히 메워지지 않은 반면 인류학과 사회학, 그중에서도 여성학과 같은 분야가 성장하면서 한국학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워크숍에 미국 내 한국학을 주도하는 중견 학자들을 대표해 토론자로 참석한 학자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USC 워크숍이 미국 내 한국학을 대표하는 행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UCLA 한국학연구소장인 존 던컨 역사학과 교수는 1960년대 말 고려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후 현재까지 40년이 넘도록 한국 역사 연구에 매진해온 ‘한국학의 대부’로 꼽히는 학자이다. 낸시 에이블맨 일리노이 대학 인류학과 교수는 한국 소작농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의 사회운동과 교육, 심지어 멜로 드라마까지 분석해 논문과 저서를 출판할 정도로 한국학  연구에 열성적이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워싱턴 대학에서 한국학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클라크 소렌슨 교수 역시 한국학의 계보를 잇는 학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또 토론자로 참가한 중견 학자들 중에는 USC 데이비드 강 국제관계학과 교수와 캐서린 문 웰즐리 대학 정치학과 교수처럼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미국 주류학계에서 중추적 위치를 확보한 학자, 신기욱 스탠포드 대학 사회학과 교수처럼 국내에 이름이 잘 알려진 한국인 교수들도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교수직에 임용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소장 학자들이 모여 비공개 워크숍을 여는 배경에는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한국학 연구자들이 미국 주류 학계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워크숍을 후원한 국제교류재단 최현선 한국학 사업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북미 주요 대학들이 한국학 교수를 임용토록 하기 위해 지난 1992년부터 20년 동안 국가적 노력을 경주했다. 그렇게 해서 현재까지 70여 명의 한국학 교수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 소장 학자들이 정년 보장 교수(tenure) 심사에서 탈락하게 되면 장기적 관점에서 구축해놓은 한국학 교육과 연구 인프라에 누수 현상이 생기고 만다.”

“다양한 시각과 분야에서 소통해 나가야 한국학의 세계화 가능”

한국학 소장 교수들의 멘토 역할을 자임한 데이비드 강 교수 역시 워크숍 초반 “소장 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 하나하나가 결국 정년 보장 교수직을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만큼 사명감을 갖고 임해달라”라는 말로 이러한 절박함을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날 행사와 같은 한국학 분야 워크숍이 서로 다른 학문 분야에 갇혀 있는 한국 관련 연구자들의 교류를 활성화함으로써 학계 간 연구의 필요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이번 워크숍에 참석한 윤교임 캔사스 대학 교수는 “무엇보다도 미국 내에서 한국 관련 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학자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 서로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수확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워크숍 격려차 USC 한국학연구소를 방문한 김병국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한국학이 인문학을 위주로 특정 지역에만 연구의 초점을 맞추는 ‘갇힌’ 영역에서 벗어나 세계와 소통하는 사회과학 분야로 뻗어나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즉,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와 역사 등 독특한 분야를 외국인의 시각에서 연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정치학·경제학·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적’ 현상과 ‘지역적’ 또는 ‘세계적’ 현상을 비교·분석하는 단계로 나아갈 때만 한국학의 세계화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김이사장은 “이러한 한국학의 발전 과제를 감안할 때 USC 한국학연구소가 주관해온 신진 학자 워크숍은 해외 한국학의 질적 도약을 위한 중요한 기회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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