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도청’ 수사, 유야무야되나
  • 채은하│프레시안 기자 ()
  • 승인 2011.08.31 00:5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실’ 못 밝히고 ‘냉소’만 남아…조현오 경찰청장, “심증 있는데 물증 없어”라며 사실상 접는 분위기

▲ 민주당 김재윤 의원 등이 지난 8월16일 경찰청을 방문해 조현오 경찰청장(맨 오른쪽)에게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KBS 도청’ 의혹이 유야무야되고 있다. KBS 기자가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를 도청했다는 의혹은 지난 2개월 가까이 정치권과 언론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KBS의 애매모호한 해명과 수사에 대한 경찰의 ‘의지박약’ 속에, 결국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무마되는 분위기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지난 8월16일 민주당 의원들이 항의 방문한 자리에서 ‘경찰 수사권 독립’ 등의 문제를 꺼내며 “심증은 있으나 직접적 물증을 찾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기 어렵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은 도청을 한 당사자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장 아무개 KBS 기자와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 등의 통화 기록 등 간접 정황은 확보했으나 녹취록이나 녹음 파일 등의 직접적인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더해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도청의 당사자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장기자의 선배인 KBS 정치부 기자 네 명에 대해 신청한 통신 내역 조회 영장도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경찰은 KBS 기자들과 한선교 의원 간의 연락 사실을 확인하려 했으나 법원의 기각으로 이것도 어렵게 되었다. 조현오 청장은 “조만간 사건 수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라며 사실상 수사를 접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경찰이 수사를 접게 된 이유 중에는 한선교 의원이 끝끝내 경찰의 소환 조사에 응하지 않은 점도 있다. 경찰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고발된 한의원측에 세 차례에 걸쳐 출석 요구서를 보냈지만 한의원은 응하지 않고 있다. 한의원은 이번 도청 의혹 연루자 가운데 유일하게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은 인물이다. 8월 임시국회, 9월 정기국회가 진행되면서 국회의원의 ‘회기 중  불체포 특권’이 그의 방패막이가 되었고, 경찰도 국회에 ‘체포동의안’을 제출하는 강수를 두지 않았다. 민주당 ‘당대표실 불법 도청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천정배 의원)는 경찰에게 “한선교 의원을 강제 수사하거나 체포해 수사하라”라고 촉구해왔다.

민주당에서도 다른 핵심 쟁점에 밀려 ‘시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별개로 민주당은 한의원을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사실상 풀어주었다. 그동안 민주당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약칭 문방위) 위원들은 한의원의 경찰 출두 등을 요구하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일정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지난 8월19일 한나라당과 타협해 문방위 일정에 복귀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측이 문방위 여당 간사를 한의원에서 다른 의원으로 교체하겠다고 합의하자 전체회의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한선교 의원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한의원이 9월1일 프로농구연맹(KBL) 총재로 취임하는 시기와 맞췄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으로서는 더 이상 한의원을 압박할 수단이 없다. 쟁점도 도청 의혹에서 멀어진 상태 아니냐”라고 말했다. 언론노조는 “한선교 의원은 간사직 사퇴 정도가 아닌,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 KBL 취임 날짜에 맞춰 간사직을 내놓는 것도 ‘꼼수’일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언론노조는 지난 8월23일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KBS 도청 의혹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10대 요구 사항 중 하나로 올렸으나 중심은 ‘조·중·동 방송 광고 직거래 금지 미디어렙법 제정 반대’에 맞추어져 있다.

도청 의혹을 두고 경영진과 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엄경철)가 날카롭게 대립했던 KBS 내부에서도 사내 쟁점이 다른 사안으로 옮겨간 상태이다. 최근 KBS는 6·25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에서 친일파로 알려진 백선엽씨를 전쟁 영웅으로 미화했다는 논란과 함께 KBS가 계획하고 있는 이승만 특집 다큐멘터리 방영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KBS 내부에서는 냉소적 분위기가 짙다. KBS의 한 PD는 “얼마 전 새 노조에서 실시했던 사내 여론조사에서도 대부분 (도청이) KBS 소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번 의혹이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무마되리라는 전망이 대부분 아니었느냐. 내부 분위기는 말 그대로 ‘냉소와 자조’이다”라고 말했다. KBS의 막내 기수인 정연욱 기자는 최근 언론노조 KBS본부 노보에 기고한 글에서 “KBS인들이 자존심과 도덕성에 상처를 입게 된 것은 모두가 품고 있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KBS를 ‘천적을 만나면 머리를 땅에 묻는 타조’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의혹의 발단이 된 ‘KBS 수신료 인상안’은 지난 6월 몸싸움 속에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문방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시켜 전체회의 상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경찰이 ‘수사 중지’ 결정을 내리면 KBS가 다시 9월 정기국회에서 수신료 인상을 재추진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KBS의 태도는 조심스럽다. KBS 홍보팀의 한 관계자는 “일단 법안이 상정된 이상 내년 총선까지는 유효한 것 아닌가. 그러나 법안 처리는 국회의원들의 권한이기 때문에 KBS에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미 KBS의 막무가내식 수신료 인상 추진에 한 번 데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총선을 코앞에 두고 얼마나 적극적 의지를 갖고 수신료 인상을 재추진할지는 의문이다. 김인규 KBS 사장의 입장에서 볼 때, 도청 의혹은 KBS 안팎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잘 넘기는 분위기이지만, ‘수신료 인상’이라는 지상 과제와 관련해서는 점점 패색이 짙어가는 느낌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