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카다피’ 시대 리비아는 어디로?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1.08.30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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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반군이 마침내 수도 트리폴리에 진군해 카디피의 관저를 점령하고 리비아의 해방을 선언했다. 카다피의 행방은 아직 묘연하지만, 카다피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토록 막강했던 카다피 군은 왜 힘없이 무너져내렸을까. 리비아 사태에 숨은 미스터리와 카다피 이후 리비아의 미래를 짚어보았다.

▲ 8월24일 리비아 트리폴리 도심 순교자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카다피 시대’의 종언을 축하하고 있다. ⓒAP연합

리비아 반군이 8월23일 카다피 관저를 점령하고 리비아의 해방을 선언했다. 관저를 수색한 반군이 카다피를 찾지는 못했으나 그가 살았든 죽었든 또는 국외로 망명했든 상관없이 리비아 내전은 막을 내렸고, 카다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카다피는 1969년 9월1일 국왕 이드리스가 신병 치료차 터키에 간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 그로부터 42년간 그는 리비아를 1인당 국민소득 1만5천 달러의 중진국으로 개조했다. 리비아는 산유국이다. 유가가 치솟던 1970년대 연간 석유 판매 수입은 5백억 달러를 넘었다. 리비아를 멕시코나 폴란드보다 앞서는 현대 국가로 만든 원동력은 물론 석유가 제공한 돈벼락이다. 그렇다고 카다피의 강력한 리더십이 기여한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집권 초기 석유로 생긴 부(富)를 과감히 분배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리비아는 혁명 20년 만에 주변의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복지 국가로 탈바꿈했다. 수도 트리폴리 중심가에 침대 여섯 개의 3층 주택에 거주하던 한 시민은 혁명 20주년 기념식 날 국영 자나 통신과의 회견에서 “카다피 이전의 리비아는 무(無)였다. 지금 리비아는 낙원이다. 카다피가 국가이고, 국가가 곧 카다피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선택에 발등 찍힌 카다피

마치 신처럼 군림하던 카다피의 몰락을 두고 다양한 분석과 전망이 나온다. 서방의 분석가들은 카다피의 성격을 “진취적이다(progressive)”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 성격에 맞게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소득 분배와 국토 개조에서 그랬고 외교에서도 그랬다. 집권 기반을 다진 그는 대담해졌다. 1988년에는 자신의 독재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미국에 대해 팬암 여객기를 폭파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탑승객 2백70명이 죽었다. 그의 반미 노선은 핵 개발로 진화했다.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이 가중되자 그는 2004년 돌연 핵을 포기하고 친미로 선회했다. 팬암기 폭파에 대한 보상금도 지불했다. 그의 진취적 리더십은 국제 사회의 칭송을 받았고 북한 김정일도 리비아 모델을 따르라는 권고까지 나왔다. 이 무렵 그의 가슴속에는 중동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이 싹텄다.

그러나 카다피의 치세는 여기까지였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도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맞서게 되었다. 봉기의 횃불을 맨 먼저 든 사람들은 부의 분배에서 소외된 서민들이었다. 석유 판매로 얻은 부는 초기에는 균등하게 분배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와 권력은 일곱 명의 아들과 딸들에게 독점되고 소득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잉여 예산은 대량의 첨단 무기를 사들이는 데 투입되었다. 화학무기도 비축했다. 물론 이 무기들을 자신의 국민을 죽이는 데 쓸 날이 올 줄은 카다피 자신도 몰랐다.

그는 지난 2월 첫 반정 시위가 터졌을 때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가볍게 보았다. 시위자들을 ‘제국주의자들에 매수된 배신자들’로 매도했다. 처음부터 강경 진압으로 나갔다. 6개월에 걸친 반군과의 전투에서 무고한 사람 2천여 명이 죽었다. 피의 대가일까, 마침내 일요일인 지난 8월21일 카다피의 최후의 거점인 수도 트리폴리가 시민군에 함락되었다. 두 아들이 반군에 체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문제의 아들 둘은 이틀 후 트리폴리의 호텔에 나타나 건재를 과시하면서 카다피도 리비아 국내의 안전한 곳에 있다고 밝혔다. 카다피 세력은 곳곳에 저격수를 배치하고 시민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혼전 양상을 보였으나 관저 함락으로 모든 상황은 끝났다. 아직 일부 공항 인근에서 교전이 계속되고 있으나 국면을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

리비아 사태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그렇게도 막강하던 카다피 군이 왜 몰락했느냐 하는 점이다. 카다피의 종말을 가져온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을 들 수 있다. 이 공습 때문에 카다피는 필요한 병력과 군수 물자를 적시에 이동시키지 못했다. 나토의 통신 감청이 두려워 작전 명령을 내리는 데 통신 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 것도 패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외신 보도에 따르면 카다피의 비극을 잉태한 결정적인 변수는 카디피 자신의 선택이었다. 카다피 군대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나 알-아사드의 시리아 군대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 카다피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자식들 외에 누구도 믿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군을 지나치게 키웠다가 그 총부리가 자신을 겨냥할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의도적으로 군을 약화시켰다는 말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군 지휘관들의 속성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그래서 자신을 상대로 한 쿠데타 가능성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하나로 군 지휘관들을 수시로 교체하고 자신의 관저를 수비하는 32여단 사령관 자리는 아들에게 맡겼다. 트리폴리 함락의 전환점이 된 것도 트리폴리 서쪽에 있는 카다피 관저를 지키던 지휘관들이 도주하거나 투항했기 때문이다. 반군 진압 작전에서 자신의 군대보다 외국 용병을 더 활용한 것도 군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카다피 군대는 지휘 체계가 서지 않았고 작전에서의 공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동부에 있는 반군의 거점 벵가지에서 몇 달 동안이나 수도로 전진하지 못한 반군의 결집력을 과소 평가한 것도 실수였다. 반군은 내전이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서방 언론이나 정부군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트리폴리 서쪽 나푸사 산에서 트리폴리에 대한 기습 진격을 개시했다. 그것이 토요일 밤인 8월20일이었다. 이 작전으로 트리폴리를 수비하던 정부군은 허를 찔렸다. 32여단을 제외한 카디피 부대들은 혼비백산해 도주하거나 투항했다. 결국 카다피의 비극은 군에 대한 불신이 자초한 결과이다.

리비아 내전의 10대 의문점

▲ 지난 8월24일 필리핀 주재 리비아 대사관 관계자들이 내던진 카다피의 사진. ⓒEPA연합

리비아 과도정부위원회(NTC)는 내전이 시민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트리폴리 함락 이후에 전개되는 양상에 비추어보면 전술적 내전 종식이 완료되기까지는 몇 주, 몇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시민군의 완전한 승리는 카다피가 생포되거나 사살되어야 한다. 하지만 카다피의 행방은 묘연하고 국내 은신설 또는 해외 망명설이 난무한다. 카다피의 생사가 확인된다 하더라도 리비아의 미래는 여전히 캄캄하다. 우선 카다피 이후의 혼란을 진정시킬 주도적 인물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내전 중에 반군 부사령관의 암살 사태까지 겪은 NTC는 내부 갈등이 심하고 무수한 부족 간 암투도 걸림돌이다. 미국 미시건 대학의 역사학 교수 리처드 미첼은 CNN과의 회견에서 리비아 내전의 10가지 미스터리를 열거했다. 카다피의 특이한 성격, 이집트와 튀니지와는 달리 정권 붕괴에 6개월의 긴 시간이 걸린 점, 리비아 봉기는 처음부터 내전이었다는 점, 나토의 지상군이 투입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이런저런 미스터리 가운데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리비아가 실질적으로 국가가 아닌 가족 집단이라는 것이다.

모든 국정을 카다피와 그 피붙이들이 농단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과도 정부가 신속하게 정권을 인수하고 질서를 회복하지 않는 한 리비아는 동서로 양분될 공산이 크다. 내전 과정에서 동부의 부족들은 반군에 적극 가담한 반면 서부의 부족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카다피 편을 들었다. 따라서 이해가 상충하는 동부와 서부의 부족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가 당장 등장하지 않을 경우 내전을 재개하든가 국토를 동서로 분할할 가능성이 있다.

유엔과 미국은 즉각 리비아에 대한 후속 조치에 착수했다. 유엔 주재 리비아 재건회의가 소집되고 미국은 동결되었던 리비아 자산 3백억 달러의 해제 절차에 착수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카다피가 세계의 주요 은행에 예금한 돈은 대략 1천40억 달러로 추산된다. 이 돈이면 리비아 재건에 충분하다. 강력한 리더십과 거액의 재건 자금이 조화를 이룬다면 리비아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희망 사항이다. 반군 내부의 암투, 카다피 세력의 처벌, 질서 회복, 유혈 보복, 부족 간 화목 등 수많은 도전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 지난 7월21일 요르단 수도 암만의 시리아 대사관 앞에서 한 시리아인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연합
리비아 혁명이 그동안 주춤거리던 ‘아랍의 봄’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2월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의 민주화 바람은 일부 독재 정권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사실상 교착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붕괴 소식이 전해진 8월22일 시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수천 명의 반정부 시위대는 탱크를 동원한 정부군의 진압에도 일제히 거리로 뛰어나와 “카다피는 갔다” “이제는 알-아사드 네 차례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이들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으면 카다피의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전단을 뿌렸다. 트리폴리 진격 소식은 리비아에서 3천2백km 떨어진 예멘에도 전해졌다.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해 치료를 받고 있는 처지이면서도 잔혹한 진압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도하센터의 한 연구원은 “이제 소중한 기회가 왔으므로 이를 십분 활용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결판을 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사실 리비아 사태는 봉기가 일어난 중동의 다른 나라들과는 현저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리비아에는 나토가 개입했고 다른 중동 국가의 지원도 있었다. 그런 이점을 가지고도 카다피를 굴복시키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이 사태를 감안하면 다른 중동 국가 시위대들이 어쩌면 투쟁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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