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이만수 결별은 예정된 귀결이었나
  • 박동희│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1.08.3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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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SK 와이번즈 팀의 감독 교체에 얽힌 비화

‘야신’이 떠나고 ‘헐크’가 왔다. SK 와이번스 야구단 감독 교체를 두고 하는 얘기이다. 8월18일 SK는 김성근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이만수 2군 감독을 1군 감독대행으로 임명했다. 2007년 부임 이후, SK를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로 이끌었던 김성근 감독의 경질은 야구계는 물론이려니와 야구팬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김감독의 후임으로 이만수 2군 감독이 선임된 것을 두고는 하나같이 “예견된 일이다”라고 평가하는 분위기이다. 충격과 예견이 교차하는 가운데 야구인들은 “지난 5년간 김성근과 이만수는 거리상 가장 가까우면서도 심리적으로 가장 먼 사이였다. 둘의 야구관을 알아야 SK 감독 교체 사태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김성근 감독-이만수 수석코치, 그 조합이 성공할까?”

▲ 김성근 전 SK 감독 ⓒ시사저널 박은숙

2006시즌이 끝나고 SK가 신임 사령탑으로 김성근 감독을 선임했을 때이다. 당시 한 프로야구팀 감독은 김성근과 이만수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두 사람이 한 팀에서 뛴다는 것에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의 이력과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출생은 물론 성장 과정이 판이했다. 김성근은 일본 교토 출신의 재일교포이다. 그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야구 선수로 출세해 가난한 부모·형제를 호강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목숨 걸고 야구에 매달렸다. 하지만, 고교 졸업반 때 일본 프로야구팀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하며 ‘일본 제일의 투수가 되겠다’라는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좌절하지 않았다. 196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며 일본에서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거듭된 혹사에 따른 어깨 부상으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실업야구 시절 그는 항상 동료로부터 ‘반쪽발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일본에서 ‘조센징’이라는 비하에 시달렸던 김성근은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도 자신이 주류가 될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은 이때부터 ‘이기는 것이 최고’가 김성근 야구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만수는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 그 자체였다. 대구의 온화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구상고-한양대에 다니는 동안 늘 국가대표에 뽑혔다. 호쾌한 장타와 강한 어깨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성적도 좋았지만, 쇼맨십과 팬 서비스가 돋보였다.

올스타 투표 때마다 최다 득표를 기록한 그는 차후 감독이 되면 “팬이 즐거워하는 야구를 하겠다”라고 공언했다. 그래서일까. 삼성 시절 이만수의 동료들은 “본인이 즐겁게 야구를 해서인지 후배들에게도 항상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플레이를 하라’라고 조언했다. 성적만큼 흥행을 중시하는 야구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두 사람의 차이점만 본다면 처음부터 ‘김성근-이만수 카드’는 실패한 조합인지 모른다. 그러나 차이점만큼이나 공통점도 많았다. SK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는 서로 달랐을지 몰라도 2006년에는 두 사람이 똑같은 처지였다”라고 말했다. 이 역시 사실이었다. 2002년 김성근은 그해 약체로 평가된 LG를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놓았지만, 곧바로 해임되었다. 이후 김성근은 아마추어 야구부를 순회 지도하다가 2005년부터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마린스에서 이승엽 전담 코치를 맡았다. 훗날 김성근이 말한 대로 ‘완전히 존재감이 묻힌 시절’이었다.

이만수도 마찬가지였다. 1997년 은퇴를 종용하는 삼성과의 마찰 끝에 은퇴식도 없이 쓸쓸하게 프로야구판을 떠났다. 곧바로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 코치를 맡았지만, 누구 하나 그를 찾지 않았다. 이만수는 지금도 당시를 “마음은 편했어도, 외딴섬에 있는 것처럼 외로운 시기였다”라고 회상한다.

SK 와이번스의 신영철 사장은, 스타일이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호흡을 맞춘다면 의외의 시너지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2008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김감독과 이수석은 세간의 우려에도 호흡을 잘 맞추었다. 이수석은 김감독의 야구를 존경했으며, 김감독은 “계약 기간 2년이 지날 때까지 이수석을 좋은 감독감으로 만들겠다”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수석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07년 SK는 김감독과 이수석의 일치된 호흡을 바탕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특히나 이수석은 그해 시즌 도중 팬들의 성화에 보답하겠다며 문학구장에서 팬티 차림으로 그라운드를 도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SK는 ‘인천에서는 죽었다 깨도 프로야구팀이 성공할 수 없다’라는 그간의 논리를 철저히 파괴하며 기록적인 관중 증가를 선보였다.

김감독을 통해 팀 성적을, 이수석을 앞장세워 스포테인먼트(스포츠+엔터테인먼트)를 실현하겠다던 SK의 계획이 100%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이듬해에도 SK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고, 문학구장은 주말이면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하지만, 영광의 이면에는 갈등의 씨앗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2008시즌이 끝나고 SK가 김감독과 3년 재계약을 하며 갈등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2009시즌을 앞두고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김감독은 이수석을 가리켜 “야구를 보는 시야가 아직 좁고, 선수단 장악력이 떨어진다”라고 감정을 토해냈다.

‘환상의 콤비’가 점점 멀어지게 된 까닭

▲ 이만수 SK 감독 ⓒ시사저널 유장훈
실제로 그즈음 이수석은 몇몇 선참 선수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수석의 타격과 수비 지도 방식에 선수들이 이견을 나타낸 것이었다. 선수들의 이견은 그대로 김감독의 귀에까지 흘러갔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김감독의 발언은 아쉬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김감독의 아쉬움은 배로 커졌다.

이수석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이수석은 “언제부터인가 감독님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터놓고 이야기할 코치들이 없다. 무슨 말을 해도 다 왜곡된 채 감독님 귀에 들어간다”라고 울상을 지었다. 한 코치는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코치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이수석이 자신의 야구관을 설명한 적이 있다. 설명을 듣자니 김감독의 야구관과 전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자칫 김감독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코치가 김감독에게 이수석의 발언을 전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이수석을 바라보는 김감독의 시선이 더욱 차가워졌다.”

김감독과 이수석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던 2009년 SK는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KIA에 패하며 3년 연속 우승에 실패했다.

2010년 김감독은 배수의 진을 쳤다. 팀이 더 강해지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에는 이수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즌 도중 이수석은 갑자기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감독은 “이수석도 감독직을 경험할 때가 되었다. 2군 감독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라며 보직 변경 이유를 설명했다. 이수석은 김감독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이때부터 SK 내부에서는 “김감독이 이수석의 지도력을 확신하지 않는 것 같다”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이수석은 몇 달 뒤 다시 1군 수석 코치로 올라왔지만, 김감독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그리고 2011년 김감독과 이수석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 악화가 동화책에서 비롯되었다는 데 있다.

2011시즌이 시작하고 이수석은 주변의 권유로 야구 동화책을 출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 책의 내용은 이수석의 미국 야구 경험담이 중심이었다. 이수석은 가장 먼저 김감독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하지만, 김감독의 표정은 싸늘했다. 이유는 감독에게 사전 보고를 하지 않고 책을 냈다는 것이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선수나 코치가 책을 출간하거나 인터뷰할 때 감독에게 사전 양해를 구하곤 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감독이 알아야, 차후에 문제가 생겨도 감독이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야구에 익숙한 이수석은 ‘동화책 출간 정도는 감독의 허락이 필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의 충돌 아닌 충돌은 지난 7월에도 있었다. 당시 이수석은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 기일에 참석하고 싶었던 한 2군 코치가 이수석에게 “고향에 잠시 다녀와도 되느냐”라며 허락을 구했다.

이수석은 경기 스케줄을 보고서 “월요일 경기가 없으니 다녀와도 좋다”라고 허락했다. 이때도 이수석은 김감독에게 별도의 보고를 하지 않았다. 2군 코치가 휴일을 이용해 아버지의 기일에 다녀오는 것까지 보고할 필요가 있겠는가 싶었다. 되레 2군 감독에 부여된 임무를 1군 감독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꼼꼼히 2군과 재활군까지 챙기는 김감독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냈다. “전쟁 중인 장수가 어떻게 전선을 이탈해 개인의 사사로움을 취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 이유였다.

2006년 김감독과 이수석을 영입하는 데에 앞장섰던 한 야구인은 이렇게 회한을 털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김감독, 이수석의 가치관과 야구관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랐다. 물과 기름이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억지로 흔들어 섞으려고 했다. 차라리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김감독은 ‘인천 예수’로 계속 남았을 것이고, 이수석도 좋은 팀을 찾아 떠났거나, 최소한 지금처럼 ‘인천 유다’라는 오명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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