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로 뛰는 ‘세계 최고 공격수’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7.2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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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신 전 두산 핸드볼팀 선수 / 대표팀 선수 겸 코치에 발탁돼 ‘새로운 시작’ 준비 중

▲ 분데스리가에서 굼머스바흐와 함부르크SV 등에서 뛴 그는 7차례 득점왕에 오르며 개인 통산 2천9백 7골을 기록했다. 2008년 귀국한 뒤에는 3년간 두산에서 활약하며 코리아컵 3연패, 코리아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 “지도자는 처음이다 보니 선수 때보다 스트레스가 좀 있다”라는 그는 지금, 공과 함께 훈련 현황판을 들고 태릉 오륜관 코트 안팎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한국 핸드볼에는 윤경신(38)이 있다. 1987년 고려고 2학년 때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1995년 12월, 경희대 4학년 졸업 직전 독일로 진출해 분데스리가에서 13년간 뛰었다. 분데스리가에서 굼머스바흐와 함부르크SV 등에서 뛴 그는 7차례 득점왕에 오르며 개인 통산 2천9백7골을 기록했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다. 2002년에는 국제핸드볼연맹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뽑혔고, 1995년·1997년 세계선수권대회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세계 최고 수준인 분데스리가에서 그만큼 걸출한 플레이를 선보인 아시아 선수는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다. 2008년 귀국한 뒤에는 3년간 두산에서 활약하며 코리아컵 3연패, 코리아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 그에게 따라붙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나 ‘핸드볼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말은 국내용 헌사가 아닌 것이다. 

최근 그가 무적(無籍) 상태가 되었다. 소속팀인 두산에서 3년 계약 종료 뒤에 8개월 연장 계약을 요구하자 윤경신은 거부하고 무적 선수를 택했다. 핸드볼 대표팀의 최석재 감독은 그런 그에게 플레잉 코치를 제의해 대표팀 선수 겸 코치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윤선수는 “애초 두산과 국내 복귀 계약을 맺을 때 3년 정도면 은퇴할 시점이라고 예상했었다. 아직 몸도 괜찮고 오는 10월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 예선전에서 티켓을 딸 수 있다는 욕심이 난다”라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몸 상태에 대한 질문에 그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처진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순발력이나 근지구력에서는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조금은 느낀다”라고 답했다.

38세라는 나이에 핸드볼같이 격렬한 경기에 필드에서 뛰는 것은 전무후무하다. 유럽에서도 골키퍼가 40대 초반까지 활동하는 경우는 있어도 필드에서는 없다. 윤경신 선수가 그만큼 몸 관리를 잘했다는 이야기도 되고, 한국 핸드볼의 저변이 그만큼 얇다는 이야기도 된다. 2백3cm의 키에 1백12kg의 균형 잡힌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세한 플레이와 빠른 스피드, 골 결정력은 한국은 물론 유럽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윤선수는 “필드에서는 서른 중반이면 고령이다. 그러나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고 체력도 괜찮다. 일단 10월 예선전이 제일 중요하다. 올림픽에서 메달 진입에도 도전해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매우 큰 선수이지만 유럽에는 2m가 넘는 선수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왜 그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아시안과 유럽인은 체격 차이가 워낙 크다. 그래서 유럽 리그에서 뛰는 아시아 선수는 별로 없다. 나는 키가 큰 반면 스피드가 살아 있고 한국에서 기본적인 테크닉을 배워갔기 때문에 통했다”라고 설명했다. 아시아계로서 키가 2m가 넘는 경우 서양인에 비해서 언밸런스한 부분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인지 이렇다 할 부상도 없었다. 그것이 그의 장수를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1백96cm에 80kg대였다. 그러다 키가 갑자기 크면서 발목이 한 번 금가고, 인대가 늘어났던 것을 빼고는 부상이 없었다. 대학에서도, 독일에서도 부상이 없었다.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물론 관리도 그만큼 잘했다. 한국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보약을 먹이며 지극 정성으로 그를 돌보았고, 독일에 가서는 웨이트트레이닝을 권유받아 열심히 했다. 섭식도 단백질 위주로 처방을 받아 철저히 관리했다. 한국식과 서양식의 절묘한 조화인 셈이다.

이 정도의 체격과 신체 능력으로 핸드볼이 아닌 농구나 배구를 선택했다면 한국에서 슈퍼스타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는 중학교 때 농구계나 배구계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또 키가 커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불편했고, 사람들이 ‘쟤는 뭔데 저렇게 키가 커’라고 쳐다보는 시선도 부담이었다. “그때는 내가 농구를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말하는 그는 결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핸드볼을 ‘바꾸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덕분에 그는 핸드볼계에서 한국이 아닌 세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서 돈도 많이 벌고 많은 친구도 사귀고 한국 핸드볼을 알릴 수 있어서, 핸드볼을 택한 것이 아쉬움보다는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유장훈

스카우트 제의는 독일이 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직전에 독일 대표팀 감독이 그에게 “귀화해서 올림픽에 함께 가자”라는 제의를 했다. 물론 거절했지만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나라 안팎이 떠들썩했었다. 그만큼 그는 독일에서도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독일 쾰른의 올림픽박물관에는 그가 신던 신발과 유니폼, 공을 전시한 ‘윤경신 전시 코너’가 있을 정도이다. 그 많은 유럽 선수를 제치고 아시아 선수가 득점왕을 차지하고 분데스리가 60년 역사상 깨지지 않는 2천9백7골의 개인 득점 기록을 갖고 있으니 그들에게 윤경신은 경이적인 존재였다. 그도 “3천 골을 채우지 못하고 2008년 귀국한 것은 좀 아쉽기도 하다”라고 속내를 밝혔다. 그의 아내가 오랜 외국 생활을 힘들어한 것도 귀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다.

대학생 신분으로 바로 해외에 진출한 그는 한국에서 사회생활도, 실업 생활도 한 경험이 없다. 때문에 “독일보다 한국에서 계약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대신 귀국 뒤 동생(윤경민)과 같은 팀에서 뛸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기쁘게 했다. 윤경민 선수는 형과 달리 오른손잡이이다. 그는 “내가 밥과 글씨는 오른손을 이용하는데 당구와 골프를 뺀 다른 운동은 모두 왼손으로 한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핸드볼 코트에서 20년 이상 동서양 무대를 호령한 그가 보기에 대표팀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20년 전에는 실업팀이 없어서 현역을 20대 중반에서 마감해야 했다. 지금은 실업팀이 생기면서 연령대가 전보다 높아지고 선수들의 노하우도 많아졌다. 운동량은 예전이 많았지만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지금이 더 탁월하다.” 다만 그는 좀 더 어린 선수를 발탁해 체력과 기술을 잘 관리해주면 좀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특히 국내 선수의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유럽은 리그가 길어서 체력이 첫 번째이다. 박중규 같은 선수는 체격도, 마인드도, 기술도 좋아서 해외에서도 잘 통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핸드볼에서 그가 이루지 못한 성취는 없다. 대표팀 생활도 20년을 넘게 했고,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다섯 번이나 땄다. 유럽 리그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명예도 안았다. 그런 그가 런던올림픽에 힘을 보태겠다고 나선 것은 핸드볼 중흥을 위해서다. 오는 10월, 올림픽공원에 새로 만들어진 핸드볼 전용경기장에서 런던올림픽 예선전이 열린다. 그는 윤경신이라는 이름으로 팬들을 경기장으로 좀 더 많이 불러모으고 올림픽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통해 핸드볼의 중흥을 이루기 위해 은퇴를 미루고 무적 선수로 뛰는 ‘무대접’을 선택했다. 그가 말했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퇴 시점을 잘 잡아서 창피하지 않게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싶다. 두산에서 거절한 것은 아쉽지만 대표팀에서 열심히 해서 마지막에 웃으면서 은퇴하고 싶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목표이다.”

“지도자는 처음이다 보니 선수 때보다 스트레스가 좀 있다”라는 그는 지금, 공과 함께 훈련 현황판을 들고 태릉 오륜관 코트 안팎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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