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젖은 그의 사진 속에서 세월의 무늬가 빛났다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4.1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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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고 사진의 대부 ‘88세 현역’ 김한용옹

 

ⓒ시사저널 임준선

1차 인터뷰를 끝내고 그가 차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한방 찻집에 가려니 생각했다. 앞장선 그가 들어간 곳은 커피전문점. 그는 “녹차라떼!”라고 주문하면서 지갑을 꺼냈다. 대형 커피전문점의 쿠폰을 꺼내서 도장을 받았다. 이런 그를 누가 88세(1923년생) 노인이라고 볼까.

20세기의 전설적인 사진가, 21세기에도 ‘현재 진행형’

광고사진 전문가, 충무로 터줏대감, 광주비엔날레 2회 출품한 예술사진가 등 김한용을 수식할 수 있는 말은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만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그가 지난 세기 100년을 통과하고 21세기에도 현재형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활인이라는 점이다. 1923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만주 봉천으로 갔다. 1944년 일제의 징병 1기로 징집되어 영하 40℃가 넘는 소련·만주 간 국경의 호림에 배치되었다가 1945년 5월 일본 시코쿠로 배치되어 광복을 맞았다. 1946년 평양에서 남하하다가 삼팔선에서 전 재산을 털렸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충무로에서 숨어지내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무명의 화가였던 이중섭과 한묵을 찍었고, 종전 뒤에는 한강철교 건너편 노량진 둔치에서 펼쳐진 에어쇼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을 찍었다.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사진을 찍은 이병철 삼성 회장이나 박두병 두산 회장, 구자경 LG회장 등 경제인들과 김지미, 신성일, 최무룡 등 한국 영화의 스타들까지 모두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충무로에서 흘러나와 전국 방방곡곡에 걸리던 한복 입은 여배우들의 사진 달력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대한민국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1960~80년대 개발 시대의 거의 모든 시각적 경험의 창조자 또는 한국 광고 사진, 출판 사진의 비조로 그를 지목해도 틀리지 않다.

88세의 그와 이야기하는 것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말하는 것도,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걷는 것도, 그 모든 것이 여유가 있고, 배려를 하고 유쾌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고집을 앞세우거나 나이를 앞세우지 않았다. “지하철에서도 여든 살 이전까지는 서서 갔다. 여든 넘어서는 다리가 좀 불편해져서 앉기 시작했지”라고 그는 말했다.

 

ⓒ김한용

그가 가장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밥은 두 끼만 먹고 세 사람 몫을 했다. 사진 한 장이 필요하다고 하면 100~2백장을 찍어다 주었다. 그러니 나랑 작업하는 것을 광고주들이 좋아했다”라고 말한다. 그의 광고 사진 전성기는 1960~70년대였다. 그때는 광고기획사가 등장하기 전이라 광고주 회사의 오너와 그 회사 총무과 직원 그리고 그가 광고를 만들 때였다. 수백 장을 찍어다 주니 광고주는 그를 좋아했다. 그렇게 그 시절에 나온 자동차나 냉장고, 맥주, 빙과, 음료 등 한국 산업화 초창기의 광고 사진은 모두 그가 찍었다. 덕분에 그는 한국 전자 산업 태동기의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한전선이나 금성사(현 LG전자)의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는 한국에서 조립 생산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본 직수입품을 스튜디오에 갖다 두고 몇 달 정도 사용하며 사진 작업을 했다.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직업이 그를 얼리 어답터로 만든 셈이다.

그는 사진 분야에서도 얼리어답터였다. 그는 “원래는 그림 그리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만주 봉천에서 인쇄과(봉천성립 봉천제일공업학교)를 나왔다. 학교에서 색 분해도 배웠으니 나중에 사진을 하면서 이상한 사진을 많이 찍었다. 필터를 이용한 특수한 사진, 다중 촬영 등 색다른 사진을 많이 찍었다”라고 말했다.

 

ⓒ김한용

그가 사진을 하게 된 계기는 1947년 국제보도연맹의 사진기자로 입사하면서부터다. 이후 부산일보를 거쳐 국제보도 사진부장을 끝으로 1959년 충무로에 ‘김한용 사진연구소’를 열면서 광고 사진 시대를 열었다. 그가 보도사진 기자 시절 남긴 기록 중에는 1953년에 석굴암을 촬영한 사진과 같은 해 독도를 촬영한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지난 1999년 <석굴암>이라는 사진집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 발문을 쓴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이 책에 실린 사진을 극찬했다. 같은 해에 촬영된 독도 사진은 일본령으로 표기된 다케시마 표지석을 뽑아버리는 장면을 담은 사진으로 사료 가치가 높은 사진이다. 이 두 작업은 그가 돈이 생겨서도, 명예욕이 생겨서도 한 것이 아니다. 이 사진이 찍은 뒤 50여 년 만에 공개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고 싶어서 그냥 했던 작업이다”라는 것이다. 석굴암을 찍을 때는 밤새 산에 있다가 새벽에 촬영하기도 했다. 독도는 언론인 홍종인씨의 초청으로 개인 자격으로 따라가 찍은 사진이다.

호기심도 많고, 장비 욕심도 많았던 그는 개인 스튜디오를 열자 이런저런 설비를 사들였다. 그 덕에 국내 잡지 출판에서 첫 컬러 사진을 찍은 것도 그의 몫이었다. 여성지 <여원>의 1962년 1월호였다. 신상옥 감독도 영화 스틸 촬영에 그를 불렀고, 4·19 직전 이승만 찬양 영화를 만들어 ‘입신양명의 기회’를 노리던 정치 깡패 임화수도 영화 스틸을 찍는 그를 불러 술을 샀다. 오비맥주 박두병 사장(두산그룹 박용현 회장의 부친)이 광고와 달력 사진을 찍을 때도 꼭 그를 찾았다. 동아제약, 해태제과, 금성사, 대한전선, 현대자동차, 오비맥주, 서광주조(진로), 백화양조 등 내로라하는 광고주는 모두 그를 찾았다. 복혜숙, 김지미, 김혜정, 안인숙, 문희, 고은아,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이경진, 황신혜 등 시대의 대표 여배우들이 차례로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얼굴…인기는 얼굴에서 생겨”

ⓒ시사저널 임준선

그의 기억에 따르면 1970년대 이전에 모델은 달력 한 컷당 3만원을 받았고, 그는 3천원을 받았다. 충무로에 많은 사진 스튜디오가 있었지만 건물을 짓고 살아남은 경우는 그가 유일무이하다. “사진 찍어서는 돈을 벌지 못했다. 한 컷 찍을 때 수백 장을 찍으니까 필름 등 재료값을 빼면 남는 것이 없었다. 대신 열심히 했다.” 그 말대로 그는 10년간 열심히 적금을 부어서 1973년 충무로 극동빌딩 앞에 살림집 겸 스튜디오를 완공했다. “내가 세 사람 일을 했다. 그래야 앞설 수 있었다. 걷는 것도 빠르다. 세 계단씩 오르고. 옛날부터 앉지를 않았다. 앉는 것은 정지거든, 정지는 후퇴고, 후퇴는 죽음이다. 그래서 항상 서서 일했다. 여든 넘어서는 다리가 아파서 앉았지만.”

그는 지금도 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스튜디오 안에는 그가 평생 찍은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화장실, 스튜디오 내부, 사무실 등 어느 공간이건 사진이 벽부터 천장까지 걸려 있다. 그 수만 장의 컬러 사진이 내뿜는 기가 질릴 정도이건만 그는 이 공간이 좋다고 했다. ‘성황당 같아 무섭지 않냐’라는 질문에 “뭐가 무서워. 저 사진 한 장 한 장을 볼 때마다 그때 찍었던 순간이 생각나는데. 그러면 즐거워. 내가 찍은 사진과 대화하는 것이지”라고 말하며 그가 웃었다. 그의 소원은 이 공간을 사진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연예인부터 문인, 화가, 정치인까지 수많은 인물을 촬영하다 보면, 특히 잘생긴 남녀만 모델로 나오는 광고 사진을 찍다 보면 그가 미추에 대해 특별한 감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가 예쁜 것인가, 누가 더 예쁜가’라는 식의 질문에 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상에는 미인이 없다”라는 말을 했다. “미남도 지구상에 없고, 미녀도 없다. 다 사람마다 결점이 있다. 주름이 많다거나 표정이 매섭다거나 다 결점이 있다. 이 여자, 진짜 미녀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마음이 아름다워야 진짜 미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르면 신경질이 많고, 그러면 정나미가 떨어지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대동소이하다. 잘난 것은 얼마 차이 안 난다.” 몇 번을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었다.

▲ 1950년대 경복궁에서 열린 야외 전시회를 촬영하기 위해 모인 사진기자들. ⓒ김한용

정치인이야 그렇다 치고, 배우는 잘생긴 얼굴이 있는 것 아닐까. 그는 묻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대부분 슬퍼 보인다. 어릴 때 야단맞고 울고 배고파서 울고 자라서, 누가 지켜보지 않을 때는 그런 모습이 보인다. 저 사람이 고생을 한 사람인지 아닌지, 혼자 있을 때 보면 모습이 드러난다.” 지금도 그럴까? “예전에 외국 아이들 사진은 참 천진난만했다. 그렇게 자랐으니까. 한국 아이들과는 표정이 달랐다. 우리도 1990년대 이후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다.”

스타의 외모를 비교하지 않는 그이지만 배우의 특성은 일부 전했다. 스튜디오 벽에 걸린 여러 사진을 가리키며 그는 “고두심씨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포즈를 취한다. 최불암씨도 이상한 포즈도 취해주고 송해씨도 표정이 재미있으니까 찍기 쉬웠다. 신성일씨는 투박하게 포즈를 한다. 그것은 성격이니까. 액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었다. 최무룡씨는 포즈를 잘 취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정치인의 선거 포스터 사진 작업도 했다. “정치인 사진은 믿음이 가고 인자하고 과단성이 있어 보여야 한다. 나는 국회의원 선거 사진을 찍을 때 ‘우선 포스터에서 1등 해보자’라고 이야기한다. 국회의원 사진은 수천 명, 수만 명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찍기 전날 가능하면 술 먹지 말고 여자와 동침하지 말고 목욕 싹 하고 오라고 한다. 나도 그럴 때는 부부 생활 안 했다. 포스터에서 1등 하자고 하면 정치인도 협조한다. 내가 사진 찍으면서, 큰소리로 ‘이 앞에 3천명이 있습니다, 어디 보고 계십니까’ 하고 호통을 친다. 내가 열심히 많이 찍으니까 모델(정치인)도 불평을 못한다. 그렇게 해서 한 3백50컷을 찍는다.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이 10장이 안 된다.” 1987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1992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찍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없어졌다고 한다. ‘잡혀 간다’고 해서 어디다 뒀는데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었으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진, 마음에 드는 작업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나중에 보고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은 들지만 내가 찍었다고 자랑한 적은 없다. 이것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꾸 시도해보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인물 사진, 광고 사진이었다. 그는 왜 얼굴을 열심히 찍었을까.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얼굴이다. 인기는 얼굴에서 생긴다. 나는 뚱뚱하면 뚱뚱한 대로 마르면 마른 대로 내가 이 사람으로 사진을 만들어보겠다는 노력을 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궁리를 하고,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 그는 캐논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이리 와서 서보라고 했다. 사진기자와 함께 셋이 나란히 서자 그는 오른손을 한껏 뻗쳐 셋이 함께했던 그 순간의 증명 샷을 남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나이는 8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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