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맥주 ‘합병’ 승부수 던지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11.04.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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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덕 회장, 위기 때마다 과감한 결단 보여 하이트-진로그룹 출범시킨 뒤 경영진도 바꿔

 

▲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고려대 경영학과 학사·1976 조선맥주 입사·1981 일광교역 대표이사·1982 조선맥주 상무이사·1988~1989 동서유리공업 대표이사 ·1991 조선맥주 대표이사 사장·1998 조선맥주 하이트맥주로 사명 변경·1999 하이트맥주 대표이사 부회장·2001 하이트맥주 대표이사 회장

박문덕 하이트-진로그룹 회장은 역시 ‘승부사’였다. 박회장은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 창업주인 고 박경복 명예회장의 차남이다. 지난 1991년 유력 후계자였던 장남 박문효씨를 제치고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맥주의 시장 점유율은 20%에 불과했다. 현재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박회장은 2년여의 준비 끝에 하이트맥주를 출시했다.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맥주 시장 점유율이 수직 상승하면서 1위를 차지했다. 하이트맥주는 이때부터 점유율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05년에는 진로를 인수했다. 주류 전문 그룹으로 또 한 번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인수전에는 두산과 롯데, CJ 등 쟁쟁한 그룹들이 참여했다. 롯데와 CJ는 기린과 아사히라는 일본 맥주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박회장은 회사의 사활을 걸고 진로 인수전에 나섰다. 결국 쟁쟁한 대기업들을 제치고 진로를 품안에 넣을 수 있었다. 위기 때마다 박회장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다. 

국내 주류업계는 최근 시장 재편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이트맥주의 경쟁사인 오비맥주는 글로벌 사모펀드인 KKR(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에 인수되었다. 처음처럼 역시 롯데그룹에 인수되면서 진로의 텃밭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자 박문덕 회장이 또다시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 4월8일 주력 계열사인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합병을 발표했다. 기존 경영진도 새로운 얼굴로 과감하게 바꾸었다. 언론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이번 조치는 전격적이었다.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합병은 일정 부분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하이트-진로그룹은 그동안 공정위로부터 여러 가지 제재를 받았다. 하이트맥주와 진로는 합병 이후에도 영업 인력과 부서를 별도로 운영했다. 가격 인상이나 주류 도매업체와의 거래도 제한을 받았다. 지난 2005년 진로를 인수했지만, 통합 마케팅에 한계가 있었다. 올해 1월 이 제한이 풀렸다. 유통 지배력 강화를 위한 영업 조직 통합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백운목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하이트맥주와 진로는 올 2월부터 소매점과 할인점 등을 상대로 공동 마케팅을 시작했다. 각 지점과 영업소도 같은 사무실과 물류센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회사 통합은 예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분석했다.

아직까지도 유통망 통합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1차 거래상인 주류 도매상의 경우 현재까지 공동 마케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영업 인력이 별도로 운영되다 보니 효율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대우증권의 분석이다. 주가 역시 탄력을 받지 못했다. 예상과는 달리 합병 발표 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4월15일 10시 현재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주가는 각각 11만2천원과 3만5천8백50원이다. 합병 발표일인 4월8일을 정점으로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9월 회사 통합 이후에는 일정 부분 합병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운목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양사의 통합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시장 점유율 상승과 함께 영업 실적 개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그는 양사의 합병으로 최소한 10% 이상 광고비와 운반비의 절약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최고 사령탑을 교체한 데도 ‘박심(朴心)’이 반영되었다는 평가이다. 박회장은 김인규 부사장과 이남수 전무, 손봉수 부사장을 각각 하이트맥주와 진로, 하이트·진로 생산담당 사장으로 임명했다. 이장규 부회장과 윤종웅 사장 등 기존 CEO는 고문을 맡으며 일선에서 물러났다.

“젊고 추진력 있는 인물 발탁”

▲ 김인규 하이트맥주 사장, 이남수 진로 사장, 손봉수 생산담당 사장(맨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

실제로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하이트맥주는 한때 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 기업이었다. 진로를 인수하던 2005년까지만 해도 시장 점유율이 60%에 육박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점유율이 하락하면서 지난해 52%까지 하락했다. 경쟁사인 카스와의 점유율 차이가 줄어들면서 영업이익도 해마다 감소했다. 올 1월에는 출고량 기준으로 카스에게 역전을 당하기도 했다. 하이트가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준 것은 17년 만에 처음이다. 진로의 상황도 비슷했다. 하이트맥주와 함께 동반 실적 부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5년 57.8%에 달하던 점유율이 지난해 43%까지 추락했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도 2009년에 비해 각각 23.9%와 48.7% 감소했다.

그렇다고 이번 인사를 단순히 ‘경질성 인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러 가지 제재로 기존 경영진이 회사를 이끌어가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존 경영진이 과도기적인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주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박문덕 회장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과감한 마케팅을 통해 과도기적 상황을 직접 헤쳐나갔다. 최근 공정위 제재가 풀린 만큼 측근 인사들을 통해 시장 장악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이트-진로그룹측도 “이번 인사가 경질성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이규철 하이트-진로그룹 상무는 “하이트와 진로의 합병과 함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젊고 추진력 있는 인물을 발탁했다”라고 강조했다. 신임 사장의 면면에서도 이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김인규 하이트맥주 사장은 지난 2007년 상무보로 승진한 이래로 매년 상무, 전무, 부사장으로 도약했다. 그룹 내에서도 유례가 없는 기록이었다. 업무 역시 인사, 마케팅, 경영기획 및 영업을 두루 거쳤다. 그만큼 박문덕 회장의 신뢰가 각별하다는 얘기이다. 이남수 진로 사장이나 손봉수 생산담당 사장 역시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사장은 1989년 진로에 영입된 후, 그룹의 해외사업본부장을 지냈다. 손사장은 지난 30년간 생산 분야만 맡아온 ‘통’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영업 능력과 전문성이 이번 인사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세 체제 역시 힘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박문덕 회장의 장남 태영씨와 차남 재홍씨는 생맥주 관련 기기 제조업체인 서영이앤티(옛 삼진이엔지)의 지분을 80% 가까이 가지고 있다. 서영이앤티의 경우 최근 여러 단계의 계열사 인수와 분리를 통해 지주회사인 하이트홀딩스 지분 27.66%를 보유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서영이앤티가 향후 그룹 지배 구조의 정점에 서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영이앤티를 통해 2세 체제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경우 신임 사장들이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한 번 승부수를 던진 이른바 ‘박문덕식’ 개혁이 어떤 효과를 거둘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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