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중 아세안 리그 충분히 만들 수 있다”
  • 신명철│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정리·김진령 ()
  • 승인 2011.04.11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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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산파역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 인터뷰

▲ 지난 4월6일 오후 서울 도곡동 한국야구위원회 회의실에서 신명철 전 국장과 인터뷰하고 있는 이용일 전 사무총장. ⓒ시사저널 윤성호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꼭 30년째를 맞았다. 지난 3월 프로야구 30년 공로상을 받은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은 평생을 야구와 함께 살아온 한국 야구의 산증인이다. 그를 만나 한국 프로야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어보았다.

올해는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시사저널>은 프로야구 산파역을 맡았던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초대 사무총장(80)을 만났다. 서울신문 해직 기자 출신으로 1982년 2월 KBO의 홍보 담당자로서 프로야구 출범 현장을 지켜보았던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이 인터뷰했다. 신편집국장은 1980년대 중반 스포츠서울에 복직해 오랫동안 야구 전문 기자를 지냈고, 지금도 야구계에 관여하고 있다. 1981년 12월 KBO 사무총장에 선임된 이래 사무총장을 3연임하며 프로야구 발전의 기틀을 잡은 이용일 전 총장은 지난 3월 프로야구 30년 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1990년대 말에는 쌍방울 구단 대행주를 맡는 등 평생을 야구와 함께한 한국 야구사의 산증인이다.

프로야구 30년 공로상을 탔는데.

30년 전이 생각난다. 1982년 3월27일 모든 관중이 꽉 찬 상태에서 프로야구의 개회를 선언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해 기뻤고, 또 잘 운용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교차하며 개회 선언을 하던 생각이 난다.

처음부터 이렇게 성공하리라고 예상했었나?

프로스포츠는 스포츠+비즈니스이다. 비즈니스로 스포츠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가 2만~3만 달러로 선진 대열에 들어서야 된다. 그때 우리나라는 2천 달러 안팎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기업이 해마다 수출을 몇십 %씩 늘려가면서, 우리나라 경제가 선진 대열에 들어설 수 있는 문턱까지 도달했다고 피부로 느꼈다. 프로야구를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시작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었나?

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했다. 매형이 선린상고를 나온 유복영이었다. 광복 직후에 국가대표팀에서 센터필드를 맡고 1번 타자도 맡았던 사람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매형이 글러브를 던져주면서 내 야구 사랑 싹을 심어주었다. 내가 서울 상대에서도 야구하고, 육군에서 야구단도 만들었다. 미아리 고개 꼭대기에 있던 나의 돈암동 집도 육군 야구단 숙소로 쓰였다. 야구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더 컸다.

기업인 출신으로 1970년대 후반에 대한야구협회 행정 총책임자로 지내기도 했는데, 프로야구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언제부터인가? 

1960년대 초는 한국 스포츠가 한창 발전하던 시기였다. 야구는 1963년 한 해에만 실업팀이 여덟 개가 늘어 모두 14개팀이 되었다. 제일은행, 한일은행, 기업은행, 해군 등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기업 경영의 합리화가 시작되었다. 운동부에다 지출하는 돈을 불필요한 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1963년부터 70년대 중반까지는 리그 우승을 하면 승급하는 데 특혜도 주고 보너스를 주었는데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그런 것이 없어졌다. 상업은행팀이 1979년도에 우승했다고 인사를 와서는 불만을 토로하더라. 그 당시에는 한일은행이 김영덕·박병일·김호진 등 좋은 멤버로 몇 년씩 우승했었다. 그 판에서 상업은행이 어렵게 우승한 것이다. 그런데 은행에서 수고했다고 2만원인가, 3만원인가를 주었다. 뒤에 각 은행 스타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진짜 야구 그만둔다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도 프로야구를 해서 선수들에게 살길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공식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에서 시작했는데.

당시 청와대 이상주 교육문화수석이 TV에서 프로스포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고 한다. 이수석이 이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하고, 대통령에게도 건의했다고 하더라. 이수석이 1981년 3월쯤, 야구협회장과 축구협회장에게 공문을 보냈다. 프로스포츠를 할 의향이 있냐고. 그때 야구협회는 1982년도에 세계아마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으니까 대회 끝나고 계획서를 내겠다고 답변했다. 이수석은 적극적으로 프로스포츠를 해보려고 하는데 답변이 이렇게 오니까 답답했다고 한다. 그때 청와대 총무수석이 야구협회 운영부장을 했던 이호헌을 추천했고, 이호헌은 나를 추천해서 셋이서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그래서 내가 프로야구 창립 계획서를 만들게 되었다.

1991년까지 KBO 사무총장을 3연임했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큰일 났다’라고 생각한 어려움이 두 번 있었다. 나는 5월18일이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5월18일에 광주에서 우연히 해태와 삼성의 경기가 잡혀 있었다. 4월20일쯤이었나, 정보기관에서 5월18~19일 게임은 취소해달라고 요청이 왔다. 그래서 내가 ‘안 된다. 이미 일정을 다 돌렸는데, 갑자기 20일 전에 그 경기 안 한다고 하면 어찌 되겠느냐’라면서 반대했다. 그때 당일 경기장에서 운동권의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있었다고 하더라. 정보기관의 반대가 심해서 결국 서종철 총재한테 보고했다. “정치적으로 경기를 한다, 안 한다 이러는데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정도를 걷지 않으면 프로야구는 장래가 문제다. 한번 정치적으로 부탁을 들어주면 다음에 또 들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라고 건의했다. 서총재도 동의했다. ‘정도를 걸어야 한다’라고. 그런 면에서 서총재는 훌륭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제 없이 이틀 경기를 다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두 번째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두 번째는 지금 생각해도 머릿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 같다. 1987년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에서 문제가 생겼다. 해태 구단 버스가 불타고, 1·2차전을 광주에서 했다. 그때 (김)영덕이가 광주 팬을 자극하는 어필을 했다. 내 기억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경기장에 나가서도 어필하고, 자기네 피처한테 가서 시간 끌고. 그래서 관중석에서 컵라면이 날아오고. 투수 진동한이 맞고. 그것이 신문에 크게 나고. 나는 대구 3차전이 걱정되었다.

별일이 없으려면 대구에서 영덕이가 응용이를 한번 꺾어주어야 조용했을 텐데, 3차전에서 삼성이 졌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 갑자기 ‘불이야’ 하는 큰소리가 나더라. 쫓아갔는데, 속수무책이었다. 몇천 명인가 하는 관중이 모여서 보고 있고, 해태 버스는 불타고, 관중 때문에 소방차는 못 들어오고. 결심을 해야 했다. 일부 운영진의 건의대로 대구 4차전을 취소하고 서울로 가면 그 다음부터는 해태-삼성전은 대구에서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서총재도 동의했다. 결국 4차전은 대구에서 무사히 치러졌다. 이 두 가지 일이 제일 고민스러웠던 일이다.

1990년대에 시작한 한·일 슈퍼게임도 우리나라 야구의 국제화에 큰 역할을 했는데.

198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장을 만났다. 나는 그때 우리 야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수에게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올스타와 일본 올스타가 경기를 해서 10 대 0, 20 대 0으로 지더라도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극은 발전할 수 있는 동인이 되니까. 한·일 올스타전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미우리 구단주에게 말했더니 다음해 2월 미야자키 훈련장으로 서총재와 나를 초청했다. 그때 요미우리의 쇼리키 회장이 “요미우리 신문이 올해 아니면 내년에 한·일 올스타전을 주최하겠으니 꼭 좀 오케이해달라”라고 말하더라.

친선전은 주니치 신문에서 주최하지 않았나?

ⓒ시사저널 윤성호

요미우리 내부 문제로 3년이 흘렀다. 그러다 주니치 신문의 가토 회장이 직접 나섰다. 그렇게 1991년 한·일전이 처음 열렸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선동렬이 주니치로 가고, 한국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야구 30년의 가장 큰 공로자는 누구일까?

가장 큰 공은 선수들에게 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고, 3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도 다 나오고. 내 기준으로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준우승한 것이 제일 큰 업적이다. 이런 배경에는 구단이 있다. 국민이 열광하니까 30년 동안 어느 구단은 5천억원, 어느 구단은 3천억원을 투자했다. 이런 기업인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그 돈이 없었다면 올림픽 금메달이나 WBC 준우승은 없었다. 세 번째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야구를 좋아해준 팬들의 열광이다.

9구단도 창단되었는데.

프로야구의 인력 풀은 고등학교 팀이다. 일본은 12개팀이 4천2백개의 고교 야구팀에 젖줄을 대고 있다. 한국은 8개 프로팀이 52개의 고교 야구팀에 기대고 있다. NC소프트와 XX 등에서 9구단 신청을 해서 창단 팀이 결정 났다. 물론 9구단을 환영한다. 하지만 프로스포츠에서 경기의 질 저하는 독이다. 개인 입장으로서는 걱정이다(프로야구 9구단 신청에 NC소프트 외에 또 다른 인터넷 기업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확인되는 사실이다).

국내 프로야구가 더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에는 야구인 출신이 없다. 아이비리그 MBA 출신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 KBO에는 돈 벌자는 사무직이 하나도 없다.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30년은 전 구단과 KBO가 합심해서 전 구단이 흑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전 구단이 흑자 경영을 하면 구단 전력이 평준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진다. 그러면 팬들이 더욱 관심을 갖고, 야구는 더 발전하게 될 것이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나?

내가 죽기 전에 아세안 리그의 기반을 세우고 싶다. 우리는 지금 4천만명을 상대로 야구를 한다. 일본은 1억2천명. 중국은 12억명이다. 이것을 합쳐서 14억명을 상대로 하는 한-중-일의 아세안 리그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말이 일본 원로 입에서도 나왔다. 지난 2월6일 장훈 선수와 NHK에 나가 대담을 할 때에도 내가 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세안 리그에 찬성이다. 우리 국민 소득이 4만 달러 정도 되면 일본 선수 연봉과 비슷하게 줄 수 있다. 2020년이나 2025년쯤에는 가능할 것이다. 그때 한·일 야구 리그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중국이 비슷한 수준이 될 때 중국을 집어넣으면 아시아 베이스볼리그가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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