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말하는 ‘한국 프로야구 30년 후
  • 박동희│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1.04.11 00: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프라 늘고 팬 서비스 나아지면 관중 1천만도 가능”

 

▲ 3월31일 경남 창원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엔씨소프트 제9단 창단 승인’ 기자회견에서 유영구 KBO 총재와 김택진 엔씨소프트 구단주, 박완수 창원시장, 김위수 창원시의회 의장(왼쪽부터)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첫해. 그해 야구장을 찾은 총 관중은 1백43만8천7백68명이었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1년.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 시즌 6백63만명이 야구장을 찾을 것으로 내다본다. 한술 더 떠 야구 전문가들은 “지난해와 같은 이상 저온과 긴 장마만 없다면 7백만 관중을 돌파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라고 자신한다. 지난 30년 동안 프로야구는 이처럼 ‘경기력 향상’과 ‘양적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많은 야구인은 앞으로도 프로야구가 끊임없이 진화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지금이 위기일 수 있다’라며 신중론을 펼친다. 과연 30년 후의 프로야구는 어떻게 변할까.

때는 2031년. 회사원 이재연씨는 오후 6시에 퇴근하자마자 강남에서 춘천으로 가는 KTX를 탔다. 강원도가 고향인 이씨는 춘천 포테이토스와 KIA 타이거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보려고 서둘러 춘천을 찾는 길이었다. 춘천역에서 내리자마자 모노레일을 타고 춘천돔 앞에 내린 이씨는 구장 안 매점에서 춘천 막국수를 먹고서 자리에 앉았다.

구장 밖은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2만5천석 규모의 돔구장 안은 진공관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이씨는 30년 전을 떠올리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때만 해도 춘천은 야구의 불모지였다. 고교 야구팀이 1개도 없었다. 돔구장은 고사하고, 1만석 규모의 야구장도 전무했다. 초등학교 시절 프로야구 경기를 보려면 경춘선 복선 전철을 타고 잠실구장까지 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강원도에 고교 야구팀이 다섯 개나 생겼다. 강원도를 연고지로 한 프로팀도 창단했다. 덩달아 전체 프로팀도 12개팀으로 늘어나 리그는 양대 리그로 나뉘어졌다.

12개팀으로 늘고, 돔구장도 곳곳에?

그때였다. 5회가 끝나고 클리닝 타임이 시작할 즈음. 전광판에 이씨의 이름이 떴다. 올 시즌 1천만명째 관중으로 뽑힌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가상의 시나리오이다. 이씨는 아직 초등학교 6학년의 리틀야구 선수이다. 하지만, 초교 야구 소년이 꿈꾸는 30년 후의 프로야구는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지난해까지 삼성 단장을 역임했던 김재하 대구 FC 사장은 “불가능할 것도 없는 시나리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 단장 시절 한 대학에 ‘미래의 프로야구, 어떻게 변할까’라는 주제의 용역을 맡긴 바 있다. 몇 달에 걸친 연구 끝에 용역 결과가 나왔다. ‘기존 8개팀에서 12개팀으로 증가, 주요 도시 돔구장 건설, 1천만 관중 돌파’라는 긍정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사장은 “1982년 출범 이후 프로야구는 2000년대 중반 잠시 주춤했을 뿐, 질적·양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국내에는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등 다양한 프로스포츠가 있다. 하지만 30년 후에는 가장 역사가 깊고, 발전 동력이 강한 프로야구 중심으로 질서가 재편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다시 말해 30년 후에는 프로야구만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고, 다른 프로스포츠의 동력을 끌어모은 프로야구가 세력을 더 확장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만수 SK 2군 감독은 미국 프로야구를 직접 경험한 인물이다.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불펜코치로 7년 동안 활동했다. 이감독은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참고할 때 한국 프로야구는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로, ‘여가’에서 ‘일상’으로 탈바꿈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메이저리그도 출범 초기에는 ‘어느 팀이 우승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보러 간다’라는 개념이 팽배했다. 구단은 마케팅보다 성적을 우선했고, 팬들도 야구를 직접 경험하기보다 관전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구단들은 성적보다 어떻게 하면 수익을 올릴까에 집중했다. 야구팬도 야구장을 찾기에 앞서 직접 야구를 경험하며 즐기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에서 야구 관전은 친척집을 방문하는 일처럼 일상이 되었다. 여기다 누구나 즐기는 생활 체육이 되었다. 30년 후에는 한국에서도 야구가 그렇게 대우받을 것이다.”

부산 동명대 전용배 교수는 KBO 야구실행위원회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한다. 전교수는 “9구단 창단으로 프로야구의 외연이 확장되었다. 10구단 창단도 몇 년 내 가능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물론 리그 확장이 반드시 프로야구 발전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교수는 “전체 프로야구 판이 커진다는 것은 아마추어 선수의 취업 문이 넓어지고,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30년 후의 프로야구는 일본처럼 탄탄한 아마추어 야구와 야구를 생활로 대하는 팬들 덕분에 지금보다 확실히 성장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타이완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라”

30년 후의 프로야구를 장밋빛으로 전망하는 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지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프로야구는 1990년대 중반처럼 쇠퇴의 길을 걸을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지금의 기회’란 폭발적인 관중 증가와 야구 인기가 고조된 것을 뜻한다. 허위원은 “1995년 5백만 관중을 돌파했던 프로야구가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 연속 2백만명대 관중에 멈췄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 시기 구단은 성적에만 치중해 팬 마케팅과 수익 창출에는 눈을 감았다. 모그룹에서 지원하는 운영비에 의존하다 보니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없었다. 급기야 2007년 현대가 공중분해 위기에 몰렸을 때에는 ‘이러다 프로야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새어나왔다.

허위원은 “10구단, 양대 지구 체제로 외연만 확장하려 노력하기보다 일반인이 야구를 직접 즐길 수 있는 동네 야구장을 지속적으로 신축하고, 프로의 근간이 되는 아마추어 야구팀 창단에 애쓰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강조했다.

경산한의대 구강본 교수도 “2008년 이후 프로야구 관중이 5백만명을 넘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유행일 수 있다. 야구 인프라가 정체되고, 구단의 질 높은 팬 서비스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유행은 금세 김빠진 맥주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구교수는 단적인 예로 영화 시장을 꼽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웬만한 영화는 1천만 관중을 우습게 넘겼다. 그러나 불법 다운로드가 횡행하고, 극장 서비스가 더는 발전하지 못하면서 영화관을 찾는 이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길게 줄을 서야 하고, 변변한 매점도 갖추지 못해 기껏 치킨과 떡볶이에만 만족해야 한다면 야구 소비자는 또 다른 문화 트렌드를 찾아 떠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구교수는 야구계와 구단의 태도를 볼 때 “30년 후의 프로야구도 지금과 비슷할 것이다”라며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조건 없는 리그 확장이 프로야구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타이완이 좋은 예이다. 1990년 발족한 중화직업봉구연맹(CPBL)은 네 개팀에서 출발해 4년 만에 일곱 개팀으로 커졌다. 경기당 평균 관중도 1만명이 넘었다.

하지만, 1997년 주요 선수들이 승부 조작 사건에 휘말리며 야구 인기가 조금씩 식었다. 여기다 CPBL이 중계권료로 4백50억원이라는 무리한 금액을 요구하자 중계회사가 대만직업봉구대연맹(TML)을 창설하며 타이완 야구는 2개의 리그가 각을 이룬다. 외형상으로는 TML에 4개팀이 소속되어 있으니 두 리그에 총 11개팀이 존재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두 리그가 별도의 챔피언결정전을 치르며 한 해 우승팀이 두 팀이 나오는 촌극이 벌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타이완 프로야구는 경기당 평균 관중 1천명대로 추락했다.

2002년 TML은 해체했다. TML 소속의 4개팀은 2개팀으로 합병하고서 CPBL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떨어진 인기는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현재 CPBL은 21년 전인 출범 첫해의 4개팀 체재로 회귀한 상태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