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죽지 않으려면 소리 쳐라
  • 전우영│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1.04.11 00:3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화 속에서 배우는 화병의 발생 이유와 심리학적 대처법

아마도 대다수 사람이 어렸을 적 읽었거나 들었던 이야기 중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가 있을 것이다. 살짝 살짝 다른 버전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귀가 당나귀의 귀처럼 컸던 임금은 자신의 귀를 백성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귀까지 푹 감쌀 수 있는 특별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자신의 과도하게 큰 귀가 무척이나 창피하게 느껴졌던 임금은 국정을 살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이 모자를 벗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카락이 너무 자라서 더 이상 깍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이발사를 불러서 머리를 깎았는데, 이발사는 임금의 귀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하고 만다.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큰 귀를 본 적도 없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자신의 귀를 보고 놀란 이발사에게 자신의 귀에 대한 비밀을 발설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잔뜩 겁을 준다. 집으로 돌아온 이발사는 왕의 비밀을 알아챘지만, 이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결국 속이 점점 답답해져서 배가 불룩해지는 병에 걸리고 만다.

시름시름 앓던 이발사는 결국 의사를 찾아간다. 그런데 의사는 이발사에게 침을 놓거나 약을 주는 대신, 이발사에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라는, 일종의 행동 치료를 처방한다. 이발사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구덩이를 하나 파고, 그 구덩이에다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10년 묵은 채증이 싹 가라앉듯이 속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 구덩이 주위에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했고, 바람이 불기만 하면, 대나무들끼리 부딪히면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 동화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정신장애 중 하나인 화병의 발생 이유와 그에 대한 현대 심리학적인 대처법을 너무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honeypapa@naver.com

 분노의 억제 때문에 발생하는 분노 증후군

미국 정신 의학회에서 발행하는 DSM-IV라는 정신장애 진단 매뉴얼에 한글의 발음을 그대로 따서 ‘hwa-byung’이라고 기술된 ‘화병’은 분노의 억제 때문에 발생하는 분노 증후군이다. 한국인에게서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억울한 감정은 있는데, 이를 풀지 못하고, 억지로 참고 억누를 때 생기는 병이다. 화병이 생기면 신체적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면증, 피로, 소화 불량, 식욕 부진, 호흡 곤란, 전신 동통 및 상복부에 덩어리가 있는 느낌 등이 나타나고, 정신적으로는 불안, 우울, 초조, 공황, 죽음이 임박했다는 두려움 등이 생긴다고 한다.

이발사의 속이 답답해지고 배가 불룩해졌다는 것은 ‘상복부에 덩어리가 있는 느낌’과 같은 화병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체 증상이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발사는 화병에 걸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발사가 화병에 걸린 이유는 바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억누르면서 참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에게서 화병이 주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참기’ 문화 때문이다.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이다. 그 덕분에 과거에 모질게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했던 며느리들이 화병에 쉽게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며느리들만 화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잘나가는 며느리 대신 손자·손녀 양육과 집안 살림까지 떠맡으면서도 집안의 평화를 위해 아들과 며느리 눈치를 보시는 시어머니가 계시다면 화병은 며느리의 몫이 아니고 바로 이 천사 같으신 시어머니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또, 요즘은 남성들도 화병에 쉽게 노출된다. 많은 남성이 회사에서 실직의 공포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는 가장의 깊은 뜻이 숨어 있지만, 이러한 행동 양식이 결국 화병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렇다면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또는 화병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고 과감히 말하면서 생활하면 화병은 걸리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 평판이라는 것은 화병에 걸리는 것만큼 피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서 살라고 말하는 것은 현명한 조언이 될 수 없다.

억울한 일을 일기에 솔직하게 기록하기만 해도 효과

여기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이발사가 썼던 방법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참아왔던 말을 속 시원하게 터뜨렸고, 그 덕분에 화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발사가 어떤 사람을 붙들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그냥 흙구덩이에 대고 참아왔던 이야기를 쏟아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억눌렸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어도 좋고, 대나무 숲이어도 좋다. 단지 억압된 감정의 문을 열어주기만 해도 화병의 증상은 완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덩이를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매일 같이 대나무 숲에 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의 복잡한 일상 속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의 심리학자인 페니베이커(Pennebaker)의 연구들은 억울하고 분한 일들을 일기에 기록하기만 해도, 마치 이발사가 구덩이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후에 얻었던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연구들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기 쓰기는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관절염이나 천식의 증상도 완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의할 점은 자신이 경험한 심리적인 상처와 감정을 솔직하게 기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기에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쓰는 것은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기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식의 일기를 쓰는 것을 아주 어색해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적지 않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일기임에도,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결과,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를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거나 자기 반성으로 마무리하는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쉽게 잘하면서, 자신의 심리적인 상처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에는 매우 서툰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와 문화가 남성들에게 어려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연습의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세 번만 우는 것이 현실감 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이제는 자신의 일기에라도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그리고 속 시원히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천천히 연습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