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에 덮인‘비밀의 상자’ 봉인 풀릴까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10.11.15 13: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전 중수부장 증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기록 다시 도마에 오를 가능성 커져

 

▲ 지난해 4월30일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검찰 소환조사를 받으러 출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6월12일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우병우 중수1과장, 이석환 중수2과장 등 수사팀이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부장이 발표문을 읽어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남짓에 불과했다. 7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사 결과 발표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내용적으로도 그동안 제기되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이렇듯 미완성인 채로 종결되었다. 의혹에 대한 결론도 짓지 못하고 표적 수사라는 비판도 벗어나지 못한, 검찰의 패배 선언과 다름없었다. 총책임자인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은 수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미 사퇴한 다음이었다.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수사는 2008년 11월19일 대검 중수부가 세종증권을 압수수색하면서 시작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고교 동창이자 경제적 후원자로 알려진 정화삼씨 형제가 체포되었고, 이는 곧바로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세종증권 매각과 관련해 거액을 받고 농협에 청탁을 했다는 혐의였다. 이 와중에 세종증권 매각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올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구속되었다. 박 전 회장의 돈이 노 전 대통령에게 유입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21명 기소돼 상당수가 형 확정

지난해 3월 대검 중수부가 박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박연차 게이트’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사 초기 70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던 ‘박연차 리스트’는 7개월간의 수사를 거치며 결국 21명이 기소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소된 인사들의 화려한 면면에서 ‘박연차 게이트’의 파장을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현 강원도지사)이 두 차례에 걸쳐 5만 달러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원기 전 국회의장, 서갑원 민주당 의원, 최철국 민주당 의원, 박진 한나라당 의원,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 등은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장인태 전 행정자치부 차관 등 전 정권 요직에 있던 인사들뿐 아니라 현 정부의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관도 검찰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밖에 현직 검사와 경찰 출신 인사 그리고 전직 김해시장 등이 기소되면서 박 전 회장의 손길이 정·관계, 재계, 사정 기관을 망라해 여기저기 뻗쳤음이 확인되었다. 기소된 21명 가운데 김정권 의원을 제외한 20명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심에서 무죄를 받은 이상철 서울시 정무부시장, 의원 유지가 가능한 80만원 벌금형을 받은 박진 의원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형이 확정되거나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박연차 게이트’가 현재 진행형이다.

천신일·한상률 귀국하면 정국 ‘소용돌이’

하지만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모두 끝났다.  그런데 이번에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한 검찰 수사 내용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면서 ‘박연차 게이트’의 불씨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노 전 대통령 수사 기록이 공개될지 여부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회장으로부터 가족들이 받은 6백40만 달러로 인해 검찰 수사를 받았다. 2008년 2월 조카사위인 연철호씨가 5백만 달러를 받아 노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에게 투자금으로 건넸고, 2007년 6월에는 권양숙 여사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전달받았다. 2007년 9월에는 딸 정연씨가 뉴욕에서 집을 구하는 데 필요한 계약금 40만 달러를 송금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사실들에 대해 퇴임 후 인지했다는 입장을 밝혔고, 검찰은 사전 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서거 상황이 발생했다. 수사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수사 기록이 봉인되면서 당시 검찰 수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수사 당사자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이 전 부장의 증언은 상당한 폭발력을 갖고 있다.

각각 일본과 미국에 체류 중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귀국하게 된다면, ‘박연차 게이트’의 파장은 더욱 확대 일로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된다. 천회장은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 연임 로비 의혹으로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까지도 박 전 회장의 구명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천회장은 박 전 회장과 현 정부를 잇는 고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상률 전 청장은 ‘박연차 게이트’의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진 태광실업과 정산개발 세무조사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연임에 성공한 한 전 청장이 노 전 대통령 후원자로 알려졌던 박 전 회장을 세무조사로 압박해 전 정권의 비리와 관련한 진술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귀국 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회장과 한 전 청장이 한국에 돌아오면 다시 한번 ‘박연차 정국’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사저널 임준선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행보는 베일에 싸여 있다. 지난 9월3일 상고심을 맡고 있는 대법원 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가 주거지 제한 변경 신청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박 전 회장의 소재를 파악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2008년 12월 구속된 박 전 회장은 지난해 11월 협심증과 디스크 수술을 이유로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했다. 대법원이 주거지를 서울삼성병원에서 서울에 있는 딸의 집과 고향인 경남 김해의 자택으로 변경하면서 사실상 운신의 폭이 자유로워졌다. 현행법에 따르면 3일 이상 주거지를 이탈하거나 국외로 나가지 않으면 검찰에 신고할 필요가 없다. 단기간이라면 전국 어디든 다닐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박 전 회장의 평소 행동을 보더라도 단순히 집과 병원만 오가며 생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그는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간에도 수시로 김해를 방문했다. 5월께에는 김해에 있는 자신 소유의 골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8월에는 김해시 장유면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하루를 묵으며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호텔 등지에서 수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은 여론의 관심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면서 한편으로는 사업 확장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광실업은 10월25일 베트남 목바이에 제3 공장을 완공하는 등 사세를 계속 확장하고 있다. 나이키 물량 점유율도 2015년까지 현재의 두 배까지 높일 계획이다. 박 전 회장은 사업 활동 재개에 의욕을 보여왔다. 3월에는 베트남 화력발전소 건설과 관련해 양해각서를 체결해야 한다며 법원에 베트남 여행 신청서를 내기도 했고, 김해에 수차례 내려간 이유도 사업 지시를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광실업의 한 관계자는 박 전 회장의 최근 행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현재 박 전 회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