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황제’의 유별난 유산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0.10.11 17: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케냐 아쿠쿠, 생전 부인 1백30명·자식 2백10여 명 거느려…“아버지로서 책임감 강했다”

 

케냐의 루오족은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 혼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다처제 가족은 대부분 갈등이 빈번하고 유지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런 루오 지역에서 무려 1백30여 명의 여성과 결혼한 케냐의 대표적인 일부다처론자가 사망했다. ‘더 스탠더드’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 10월3일 케냐 지방도시인 은디와 행정구역에서 아센투스 오그웰라 아쿠쿠 씨(92)가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다른 실패한 일부다처제 가족과 달리 그는 꽤 성공적이며 생산적인 일부다처제 가족을 이루었고, 그래서 케냐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는 12명의 아내가 함께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생존해 있는 아내만 46명에 이른다. 케냐 남성의 평균 연령은 40대 후반 정도이다. 따라서 장수한 아쿠쿠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자식도 많다. 35명의 아들과 20명의 딸은 그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다.

생전 아쿠쿠는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스스로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와 멋진 옷맵시 그리고 여성의 요구에 즉시 응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Danger(위험 인물)’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이 별명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아쿠쿠는 2008년 ‘Politicalarticle.net’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위험 인물로 불린다. 왜냐하면 다른 남성들을 내가 다 압도하며 물리쳤기 때문이다. 내가 잘생겼기 때문에 많은 부인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위험 인물’이라고 지목한다”라고 말했다.

아쿠쿠는 1918년 케냐의 칸얌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대신 선천적인 사업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재단사 교육을 받았고, 케냐에 있는 아프리카 최대 호수인 빅토리아 호수 주변에 가게를 열었다.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아쿠쿠는 주위 여성들에게 부유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는 생전에 했던 한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날을 떠올리며 “나는 당시 호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가졌었고, 여성들에게 항상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원하는 여성이 있으면 반드시 내 여자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쿠쿠는 1939년 첫 부인인 디나 아쿠쿠와 결혼했는데 이듬  해인 1940년, 이미 다섯 번째 결혼을 할 만큼 초고속으로 일부다처제 코스를 밟아나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결혼한 때는 첫 결혼을 한 뒤 58년이 지난 1997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마지막 결혼식 때 얻은 신부는 당시 18세에 불과했다. 무려 61년이라는 연령 차를 극복한 세기적 결혼이었다. 그 마지막 신부는 지금 31살이 되었고 세 아이의 엄마이며, 아쿠쿠가 가장 사랑하는 부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마지막 아내를 ‘돌보미’라고 부른다. 아쿠쿠는 “그녀는 나의 절반이고, 나를 쓰다듬어 주는 사람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려 2백10여 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추산된다. 가족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그 자신도 정확하게 추산하지는 못한다. 언론에서도 제각각 다른 숫자가 나왔다. 사후에 쏟아진 대다수의 기사는 자식 수를 2백10여 명으로 보도했지만, 생전 인터뷰에서는 4백명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었다. 어쨌든 아쿠쿠 가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그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마을만 네 개나 되고, 인근 다른 지역에 사는 가족까지 감안할 경우 인근에 아쿠쿠 패밀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아쿠쿠는 1970년대에 자식들을 위한 초등학교 두 곳을 지역 사회에 지었고, 가족들을 위한 교회 역시 따로 세웠다.

▲ 아센투스 오그웰라 아쿠쿠 .

생전에 밝힌 아쿠쿠의 가족 운영 노하우

안정적으로 일부다처제 가족을 운영한 덕에 아쿠쿠는 케냐의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루오족 사회에서 아이콘 같은 인물이었고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점점 커져갔다. 케냐의 정치인들조차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만나러 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찾는 방문객들 중 대다수는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케냐 남성들이었다. 아쿠쿠에게서 일부다처제 가족 운영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그의 집 문지방을 넘나들었다.

그는 2년 전 ‘Politicalarticle.net’과의 인터뷰에서 자신만의 가족 운영 노하우를 살짝 밝힌 바 있다. 우선 아쿠쿠는 자녀의 수를 부인 한 명당 네 명으로 제한했다. 그리고 수많은 자식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했다. 어떤 아이가 어떤 아내의 자식인지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내 아이들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것을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태어날 때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난 아이들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다”라고 회고했다.

아쿠쿠는 매일 아침마다 다이어리를 들여다보고 앞으로 방문해야 할 부인의 집을 체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이 필요한 것들을 살피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이 가족들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를 원했다. 만약 아이들이 아플 경우 부인들은 반드시 그에게 말해야 했다.

▲ 케냐의 한 부부가 결혼 50주년을 맞아 손녀들을 앞세우고 금혼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족 구성원에게도 책임감을 부여했다. 특히 ‘나눔’을 강조했는데 ‘교육’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부인별 첫째 자녀들만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는데, 이 첫째들은 자신이 받은 정규 교육을 바탕으로 나머지 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반면 채찍도 있었다. 아쿠쿠는 아내들의 집을 감시할 수 있는 스파이를 심어 두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각 집마다 스파이를 심어 두었다. 그들은 내게 각 부인들이 내가 여기에 없을 때 하는 활동을 밤낮으로 알려준다”라고 토로했다. 때로는 사적인 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 생활에 심각한 위험이 제기된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쫓아냈다. 그렇게 쫓아낸 부인만 85명에 이른다. 그가 예민하게 반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아내의 외도를 방치했다가는 가족의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케냐는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위험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HIV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이 크기 때문에 각 부인들이 지켜야 할 의무를 엄격히 다루어야만 했다”라고 말했다.

아쿠쿠는 말년에 “또 다른 재산을 가져서 자랑스럽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는 “지금은 내 아이들이 나의 재산이다. 나는 그들을 잘 교육시켰다고 생각한다”라고 뿌듯해했다. 아쿠쿠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가족 간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나름의 단체까지 만들었다. 일명 ‘가족 복지 연맹’이다. 연맹의 회장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던 톰 아쿠쿠이다. 그는 케냐 제2의 도시인 몸바사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이다. 인원 수가 많다 보니 아쿠쿠의 자식들 중에서는 의사, 법조인, 선생님, 경찰 등 다양한 전문직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