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바다’에서 숨은 진주 찾기
  • 라제기 |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0.10.04 18: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 거장들의 걸작 사이사이 될성부른 아시아 감독들의 신작에 호평 잇따라

올해 15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은 어느 해보다 알차고 풍성하다. 중국 거장 장이머우의 <산사나무 아래>가 개막을 알리는 이번 영화제에서는 10월15일까지 67개국 3백8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신과 인간>, 최우수 여자배우상 수상작 <증명서>, 감독상 수상작 <순회공연> 등 시네필의 귀에 익은 영화가 적지 않다. 덜 알려졌지만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영화가 훨씬 더 많이 준비되어 있다. 부산영화제를 즐기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 장이머우 감독의

부산영화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 영화의 쇼윈도이다. 올해에도 될성부른 아시아 감독의 신작이 대거 부산을 찾는다. 2007년 부산프로모션프로그램(PPP) 지원작인 베트남 영화 <비, 두려워 마>와 싱가포르 영화 <모래성>은 올해 칸영화제 초청작이다. <비, 두려워 마>는 오랜 세월 해외에서 지낸 할아버지가 귀향하면서 벌어지는 가족 안의 갈등을 그린다. 김지석 부산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는 “베트남에서 온 놀라운 데뷔작이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모래성>은 군 입대를 앞둔 한 청년이 겪는 성장통을 다루었다.

중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불리는 펑샤오강 감독의 <대지진>,  필리핀 영화 <트럭 밑의 삶>도 눈여겨볼 영화이다. 어린 딸과 트럭 밑에서 살아가던 한 여인이 딸을 잃은 뒤 벌이는 복수극을 통해 비정한 남성 중심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는 “올해 필리핀 최고의 수작이다”라고 말했다. 신분 차이로 소원했던 가족들이 장례식과 결혼식을 계기로 다시 만나는 내용을 다룬 필리핀 영화 <결혼식과 장례식>, 인도 최고의 스타 리틱 로샨이 주연을 맡은 <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하는 전등 기술자의 모습을 다룬 키르기스스탄 영화 <전기 도둑>도 주목되는 영화이다.

세계 영화의 흐름 읽을 수 있는 기회도

부산에서는 세계 영화의 흐름도 가늠할 수 있다. 엄마의 유언에 따라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중동 여행에 나섰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 쌍둥이 남매의 이야기를 그린 <그을린>을 가장 주목해야 할 듯하다. 전찬일 프로그래머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역설하는 영화이다. 시대를 넘어 미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을 문제작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는 “<그리고 세 번째 날에>는 이스라엘인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로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 오래전 사라졌던 어머니가 동생을 데려간 사실을 알고 애타하는 한 소년원생의 이야기를 다룬 <휘파람을 불고 싶다>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영화의 여전한 활력을 보여주는, 그저 놀라울 따름인 영화이다”라고 평가했다. 스웨덴-폴란드 합작 영화인 <모정과 사랑 사이>는 아동 밀매를 피해 고국 벨라루스를 떠난 젊은 여자와 딸이 스웨덴 난민 캠프에서 겪게 되는 악몽을 그려낸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유럽의 혼란을 그리고 있다.

이탈리아 영화도 주목할 만하다. 이수원 프로그래머는 “<어느 감독의 수난>은 이탈리아 코미디의 저력을 보여주는 감동 드라마이고, <말라볼리아가네 사람들>은 뛰어난 비주얼과 음악으로 이루어진 걸작이다”라고 평가했다.                                    

 

                                

적인걸은 당나라 때 평생 1만7천여 건의 사건을 해결했다는 명수사관으로, 중국인들에게는 물론 20세기 소설가 반 훌릭의 <디런지에> 시리즈에 의해 외국에도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 <적인걸>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적인걸의 활약을 보여주는 추리물이다.

 

영화는 서극 감독의 작품답게 판타지와 무협의 요소를 품고 있지만, 영화의 핵심은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과학 수사이다. 또한 2백24억원의 제작비가 든 거대 세트는 중국 영화 특유의 스펙터클을 뽐내지만, 영화가 진정으로 주력하는 시각 효과는 7세기 당나라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다. 영화 속 7세기 낙양은 과연 근대적이며 국제적이다. 인체 자연 발화라는 현상을 화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나, 공명을 이용해 무기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 등은 과학을 서양 근대의 전유물인 양 이해하는 이분법을 넘어서게 한다. 하지만 7세기 낙양에 서양 근대를 겹치려는 시도가 다소 무리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다. 귀도시의 지하 수로에서 <오페라의 유령>이나 18세기 베니스가, 측천무후의 외출복에서는 20세기 초 유럽 패션이 연상되는 것은 몰입을 방해한다.

<적인걸>은 정치적으로 <영웅>과 궤를 같이한다. 두 아들을 권좌에 앉혔다 폐하고 공포 정치를 행하는 측천무후에게 직언을 고한 적인걸은 8년간 감옥에서 민생이 안정되고 있음을 알아챈다. 그는 무후의 독재에 반대했지만, 오히려 반란으로부터 무후를 구하고, 황제로 받든다. 그것이 ‘중화’와 ‘안정’이라는 대의에 맞기 때문이다. 복수심·정파·명분·편견 등 작은 차이를 버리고, 하나의 강력한 구심 아래 모여야 한다는 ‘중화주의’가 만개하는 현장이다. 설령 통치자가 비민주적일지라도 민생만 안정되면 참을 만하고, 또 참아야 한다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현재의 중국, 현재의 한국이 겹쳐지는 질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