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으로 몬 ‘가문의 고난사’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0.08.2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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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가 재벌3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 왜 자살했나

고 이재찬씨(46)의 시신은 지난 8월18일 밤 9시쯤 서울 한남동에 있는 순천향대학병원에서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삼성서울병원으로 운구되었다. 이재찬씨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로, 지난 8월18일 새벽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한미디어에서 고인과 함께 일한 신용열씨는 “유가족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해 장례가 어떻게 치러질지 모르겠다. 지인인 나조차도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신이 집 앞에서 발견되자마자 옮겨진 순천향대학병원에서조차 유가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안내데스크 근무자에게 빈소가 어디인지를 묻는 취재진만 분주히 오고 갔다. 형 재관씨나 동생 재원·혜진 씨는 취재진의 눈에 띄지 않았다. 별거 중인 것으로 알려진 부인 최선희씨는 두 아들과 함께 발인식에 참석했다.

▲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인 이재찬씨의 발인식이 8월20일 서울 일원동 삼성병원에서 엄수된 가운데 유가족들이 영정 사진을 따라 고인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이재찬씨는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의 차남이다. 형인 재관씨와 함께 새한그룹을 이끌며 주력사인 새한미디어 사장을 지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숙부가 되고 이인희 한솔그룹 회장과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고모가 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는 사촌 간이다. 이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당일 시신이 안치된 순천향대병원이나 삼성서울병원을 찾은 숙부, 고모, 사촌은 없었다.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이회장과 이부사장이 싱가포르에 머무르고 있다. 8월19일 현지 일정이 이미 잡혀 있어 귀국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라고 말했다. 이 탓인지 유가족은 8월19일 빈소를 차리지 않고 조문객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을 숙부, 고모, 사촌 형제로 둔 재벌 3세라고 하기에는 이재찬씨의 삶은 너무나도 곤궁하고 비참했다. 자살하기 직전까지 서울 용산구 이촌동 아파트에 월세로 입주해 혼자 살았다. 부인 최선희씨와는 오래전에 별거했고, 슬하에 아들 둘이 있었으나 자주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활고도 심했다. 이씨는 동네 슈퍼마켓, 세탁소, 문방구에 100만원가량의 외상 빚을 지고 있다. 더욱이 이씨는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 이웃 주민들은 기자들에게 “(이씨가) 밤에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군복 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총과 칼을 차고 다녔다”라고 말했다.

부친인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 시절에 비극 싹 터

이씨가 자살로 마감한 가문의 비극은 아버지인 고 이창희 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병철 회장은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정부 보증 민간 차관으로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비료공장 기계를 수입하면서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당시 돈으로 2천억원)를 받았다. 이 자금으로 사카린의 원료이자 요소비료 제조 과정에 쓰이는 OTSA 43kg짜리 포대 2천3백부대를 밀수했다. 밀수로 폭리를 취하고 일본 기업으로부터 리베이트까지 받은 사실이 폭로되면서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 탓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1970년대 말 경영 일선에 복귀하려 했다. 이때 반기를 들고 나선 이가 이창희씨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창희씨는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났고, 삼성그룹 경영권은 삼남 이건희 회장에게 승계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1976년 9월 가족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을 삼성그룹 차기 총수로 확정했다. 이창희씨는 삼성그룹을 떠나 홀로 서기에 나섰으나 1991년 7월 혈액암으로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 아들은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된 제일합섬을 넘겨받아 기존 새한미디어와 함께 새한그룹을 출범시켰다. 미망인 이영자씨가 회장, 장남 이재관씨가 부회장을 맡았고 재찬씨는 주력사인 새한미디어를 이끌었다. 새한그룹은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구미공장에 1조원가량을 투자했고, 계열사를 12개로 늘려 자산 규모 기준으로 재계 27위까지 올랐다. 재찬씨가 맡은 새한미디어는 마그네틱과 광학매체 제조업체였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은 경영 위기로 이어졌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그룹 부채가 1조7천억원이나 되었다. 주력사인 제일합섬과 새한미디어는 경기 침체 탓에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룹 경영 실적은 악화 일로를 거듭했다. 결국 채권 금융 기관들이 자금 회수에 나섰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조카들이 겪는 어려움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새한그룹 오너 일가는 회사 지분과 집을 비롯해 사재 전부를 내놓고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재찬씨도 2000년 11월 새한미디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주력사 ㈜새한(제일합섬 후신)은 2008년 웅진그룹이 인수해 웅진케미칼로 사명을 바꾸었다. 채권단은 지금, 새한미디어를 GS그룹 계열사 코스모화학에게 매각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재관 부회장은 워크아웃 직전 분식회계를 통해 대규모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2003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재찬씨는 연예·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심을 갖고 ‘디지털미디어’라는 계열사를 통해 드라마·음반 제작 사업을 벌였으나 이 회사 경영권도 잃었다. 두 형제는 범(汎)삼성가 모임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관·재찬 형제는 지난 2월 호암 탄생 100주년 행사 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유서나 가족 증언이 없다 보니 자살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고인과 가까이 지낸 지인들은 “가문의 불행이 최악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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