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열정 뒤로하고 ‘엘레강스’하게 지다
  • 김세원 | 편집위원 ()
  • 승인 2010.08.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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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패션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의 일과 인생

 

▲ 2006년 7월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열린 제43회 대종상 영화제 레드카펫 행사에서 앙드레 김이 환하게 웃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지난 8월12일 세상을 떠난 앙드레 김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 디자이너이자 ‘엘레강스하고 타스틱한’ 말투와 차별화된 외모로 대중문화 아이콘 반열에 오른 한국 패션계의 거목이었다.  

그의 패션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2007년 2월 <시사저널>과 가진 스페셜 인터뷰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동네에서 열린 전통 혼례식을 보고 족두리며 활옷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반해 틈만 나면 누이와 여동생을 모델로 예쁜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리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2002년 펴낸 회고록 <마이 판타지>에서 그는 한국전쟁 와중에 피란 갔던 부산에서 오드리 헵번이 주연하고 지방시가 의상을 담당한 영화 <퍼니 페이스(Funny Face)>를 보고 여성의 아름다운 꿈을 실현하는 옷을 만드는데 평생을 걸겠다’라고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혼자 서울로 올라와 양장점에서 일하던 그는, 1961년 고 최경자씨가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자 1기생으로 입학했다. 30명의 입학생 가운데 단 세 명에 불과했던 남학생 중 한 명이었던 앙드레 김에 대해 최경자씨는 자서전에서 ‘재능이 많고 감각이 뛰어났던 제자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국제복장학원에서 1년간의 과정을 수료한 그는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열고 화려하게 패션계에 데뷔했고 이후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라는 이름의 의상실을 열었다. 반도호텔 근처에 있던 양복점 ‘GQ테일러’에 무작정 찾아가 쇼윈도 한쪽을 빌려 연 의상실이었다.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려면 부르기 쉽고 빨리 기억될 수 있는 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붙여준 것이다. 1년 뒤 프랑스식 ‘살롱 드 앙드레’는 ‘앙드레 김 의상실’로 이름이 바뀌었다. 국내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 앙드레 김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데뷔 당시부터 패션계의 이단아였다. 여성 일색인 패션계가 남성, 그것도 일반적인 한국 사람과는 매우 차별화된 외모와 사고방식을 가진 독신 남성을 환영할 리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앞서 추진한 국제화와 ‘셀리브리티 마케팅(유명 인사 마케팅)’ 덕분이었다.

그는 1964년 당시 톱스타였던 신성일-엄앵란 커플의 결혼식 때 엄씨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것을 시작으로 김지미·문희·윤정희 등 은막 스타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집트 피라미드 앞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아 바르셀로나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1959년 김지미·최무룡 주연의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 프랑스 종군기자 역으로 출연하며 한때 배우를 꿈꾸기도 했던 앙드레 김은 특히 연예계와도 인연이 깊었다. 그의 패션쇼는 전문 모델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등장해 혼례복 차림을 한 남녀 모델이 이마를 맞대는 장면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그의 패션쇼는 연예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을 인정받아 1997년 패션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도 훈장을 받았다. 1999년 그의 패션쇼가 열렸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1월6일을 ‘앙드레 김의 날’을 선포했고, 2005년에는 한국복식학회가 주는 최고 디자이너상을 받았다.

패션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국민적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99년 정·관계를 뒤흔든 ‘옷로비’ 청문회였다. 당시 검찰총장 부인, 장관 부인 등 고관대작 부인들이 옷을 구입한 매장으로 지목되어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오게 된 앙드레 김은 본명이 그가 추구하는 우아함과 세련됨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이는 김봉남(金鳳男)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옷로비 사건에 대해 ‘억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라고 토로했음에도 이 사건은 그가 예능 프로그램의 개그 소재로 등장하며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흰색의 순수함 추구한 열정의 예술가

▲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8월13일 오후 서울대병원 빈소를 찾아 전날 타계한 패션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흰 옷만 고수하는 패션과 머리카락을 새까맣게 염색하고 이마 윗부분까지 까맣게 칠한 독특한 헤어스타일, 진한 메이크업으로 흰색에 가까워진 얼굴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직접 디자인한 100여 벌의 흰색 의상과 흰색 자동차, 의상실의 흰색 인테리어 등 흰색을 고집하는 데 대해 그는, 어릴 때부터 눈을 좋아했고 흰색이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함과 우아함 그리고 환상적인 세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말할 때 콧소리를 많이 섞고 영어를 많이 쓰는 그의 독특한 화법은 개그맨들의 성대모사 1순위가 되기도 했다.

 생전에 인터뷰에서 “신사동의 부티크로 출근을 하지 못하는 휴일과 연휴가 싫다”라고 거침없이 토로할 만큼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패션쇼마다 봉황과 용, 사슴뿔 등을 형상화한 자수 디테일로 동양의 전통미와 서양의 스타일을 조화시켜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작품 세계를 일구어나갔다. 

지상파 방송사의 몇몇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가 보여준 패션에 대한 철학과 나이를 잊은 열정적인 삶의 모습은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끊임없이 시대와 소통하기 위해 매일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 19개의 신문과 5개의 방송을 본다는 그의 생활 습관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패션쇼에 출연했던 스타는 물론 한 번 인터뷰한 기자나 패션 관계자의 대소사까지 직접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인들의 행사를 달력에 적어놓고, 100송이의 흰색 장미꽃이나 흰색 구슬이 장식된 트리 등을 만들어 보냈다. 연인의 만남과 이별, 사랑과 결합을 의상과 음악을 통해 표현한 그의 패션쇼는 스타 섭외부터 스토리텔링, 의상 구성, 음악 선정까지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독창적인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대신 1982년에 5개월 된 남아를 입양해 애지중지 키웠다. 2005년 대장암 진단을 받은 이후 항암 치료를 받는 등 투병 생활을 계속했지만, 마지막 외부 행사였던 지난 5월 장동건-고소영 결혼식에 참석할 때까지도 주변에 병을 함구할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3년 전 인터뷰에서 후계자 양성을 묻는 질문에 아직은 아쉽고 부족한 점이 많아 후계자를 키우기보다는 스스로 계속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던 앙드레 김. 현실에서 그의 삶은 75세에서 멈췄지만 대중들의 가슴속에 그는 흰색의 우아함과 순수함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열정의 예술가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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