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허무는 ‘월드컵홀릭’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10.06.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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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열기와 더불어 응원 문화도 진화 거듭…장소 다양해지고 참가자들 표현 방식도 더 대담해져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은 어느새 새로운 ‘축제’가 되었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승패를 떠나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친다. 자치단체들이 주관하는 이른바 ‘관제 축제’가 아닌 자발적인 축제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이다. 한국의 독특한 월드컵 응원 문화는 국민 전체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지난 6월17일 한국은 아르헨티나에 패했지만 응원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경기를 몇 시간 앞두고 거리는 응원 장소로 이동하려는 차량들로 북적였다. 지하철·버스 등에도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형 마트와 편의점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를 관람하는 동안 입을 즐겁게 할 치킨·족발·과자·맥주·음료수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붉은 티셔츠, 두건, 머리띠 등 응원 도구를 뒤늦게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수진씨(37)는 “퇴근하면서 응원에 필요한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대형 마트에 들렀다. 인기 메뉴인 치킨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내 차례가 조금 지나 모두 동이 났다”라고 말했다. 경기가 임박하자 도로에는 차가 사라졌고, 마트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도 썰물처럼 빠졌다. 다들 거리에서, 호프집에서, 가정에서 뚫어질세라 경기 중계 화면에 집중하며 태극전사에게 응원의 함성을 보냈다.

2010년 응원 풍속도는 과거와 비교해 여러 측면에서 진화했다. 우선, 응원 장소가 다양해졌다. 2002년 월드컵은 온 국민을 흥분 상태에 빠뜨렸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대부분 ‘Be The Reds’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붉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2010년 붉은 악마들은 더 이상 거리 응원만 고집하지 않는다. 가족, 직장 동료, 친구들과 주변에 있는 음식점이나 공원, 가정에서 응원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직장인 박성훈씨(32)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응원하기 위해 호프집을 예약했다. 거리 응원도 좋지만 가까운 사람들과 편안한 분위기에서 관람하는 것을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대규모 거리 응원이 펼쳐지는 서울광장과 코엑스 인근에 위치한 호프집은 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거리 응원단과 바로 합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 상영관도 응원 장소로 애용되었다. 경기가 중계되는 상영관은 경기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예약이 매진되었다. 아르헨티나전부터 시작된 3D 입체영상 중계는 극장 중계에 대한 관심을 더욱 촉발시켰다.

응원 장소가 다양해졌지만 거리 응원 문화가 잦아든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전이 열린 6월17일 서울광장, 코엑스 인근, 한강 시민공원,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해운대 백사장 등 전국 각지에 마련된 거리 응원 장소에는 어김없이 붉은 물결이 넘실거렸다. 서울에서만 50만명, 전국적으로 1백60만명이 거리 응원에 참가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그리스전과 달리 날씨도 도와주었다. 그리스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은 아르헨티나전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고,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거리 응원에 나선 붉은 악마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대~한민국!’을 외치며 ‘짝짝 짝, 짝짝’ 손뼉을 쳤다. <승리를 위하여> <승리의 함성> 등 응원가도 다양하게 울려퍼졌다. 

▲ 지난 6월17일 아르헨티나전을 관람하는 거리 응원단이 한강 반포지구 플로팅아일랜드에 모여 환호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승부 떠나 응원 자체를 즐기는 사람 많아

거리 응원은 젊은이들의 축제가 되었다. 가족 단위나 40~50대 붉은 악마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젊은이들은 패션부터 남다르다. 천편일률적인 공식 티셔츠를 그대로 입기보다는 개성이 드러나는 패션과 응원 도구로 무장한다. 태극기를 이용한 패션도 더욱 진화했다. 젊은 여성들도 노출을 꺼리지 않는다. 다리가 드러나는 핫팬츠는 기본이고, 등이 훤하게 파이고 가슴골이 드러나는 상의를 입은 여성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는 태극기,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치우천왕, 태극전사 등번호 등을 바디페인팅으로 새겨넣었다. 응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승부라는 요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경기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응원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시작부터 골을 먹으면서 완패했음에도 응원 열기가 경기 끝날 때까지 이어진 아르헨티나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젊은이들에게 응원이 펼쳐지는 거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공연장이다. 마음껏 고함치고 응원가를 따라 부르며 거리 응원 분위기를 ‘소비’한다.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목적은 달성된다. 이성과 만남의 장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남성끼리, 여성끼리 응원을 나온 무리들이 골 장면에 환호하고 응원 도구를 나누며 가까워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의 거리 응원 문화에서 승부라는 요소가 희석되면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었다. 2002년 붉은 물결이 대한민국 곳곳을 뒤덮었을 때 일각에서는 대립과 경쟁을 속성으로 하는 스포츠에서 승리에의 열광이 외부 세계에 대한 배타적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축구 경기에서의 승부를 국가적 자존심 대결로 투사한다는 것이다. 집단주의에서 기인한 군중 심리가 다양성을 억압한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거리 응원 문화를 다양성을 표출하는 창구로 진화시켰다. 거리 응원에서 싹 튼 촛불 집회도 소수 목소리를 응집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바 있다.

반면, 거리 응원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제축구연맹은 거리 응원 장소에서 주최하는, 기업을 드러내는 마케팅 활동을 금지시켰다. 월드컵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월드컵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해법을 찾아냈다. 그중 하나가 축하 공연이다. 거리 응원을 하는 사람들은 경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모여든다. 경기 전까지 짧지 않은 시간을 채워주는 것이 연예인들의 축하 공연이다. SK텔레콤은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서 거리 응원을 주관했다. 이곳에서는 경기 시작 전 가수 김장훈과 싸이의 축하 공연이 열렸다. 김장훈과 싸이는 월드컵을 앞두고 SK텔레콤이 펼친 응원 마케팅 방송 광고 모델이다. 광고를 통해 이들을 접했던 사람들이 SK텔레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획사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월드컵 응원녀’ 이야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슈가 되었다. 사실, 이슈가 된다기보다는 이슈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다. 연예인 지망생을 띄우기 위한 기획사의 작품이 언론사에 의해 재생산되면서 이슈 아닌 이슈가 만들어지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2002년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이 거리 응원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거리 응원이 전체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본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월드컵 응원녀’처럼 눈에 보이는 마케팅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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