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배출한 ‘인재 용광로’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4.2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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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시리즈 - 한국의 신 인맥 지도 | 포항·영덕

▲ 포항시 포스코 일대      ⓒ 현대건설 제공

 

 

포항이 낳은 유력 인사들은 거의 포항고와 동지상고 출신들이다. 일찌감치 대구, 서울로 유학길에 나선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학교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들이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직후인 1951년 같은 해에 개교한 두 학교이기에 졸업 횟수도 똑같은 숫자로 나간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변변한 대학이 없던 시절, 하나는 인문계 공립학교로서 다른 하나는 실업계 사립학교로서 양대 기둥이 되어 지역의 동량을 키워냈다.

포항의 근세사에는 몇 가지 터닝 포인트가 자리 잡고 있다. 1968년 4월1일 현실화된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설립은 여러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위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앞선 1952년 8월1일 해병대의 포항 기지 주둔과 1958년 4월 해병포항기지사령부 발족 역시 포항의 면모를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단일 부대로는 최대 규모라는 해병부대가 차지하는 경제적·사회적 비중은 만만치 않다. 또, 1995년 1월1일 포항시와 영일군을 합친 통합 포항시의 탄생은 도시가 한 단계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포스코가 설립해 국내 최우수 대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포스텍(포항공대)은 전국의 수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했다.

포항시의 발전 과정에서 남다른 노력과 기여를 아끼지 않은 인사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벅차다. 이명석 선생(1904~1979)은 영덕 강구에서 출생해 일본관서미술학교에 유학했으며 광복 후 포항에 정착했다. 포항예술인총연합회를 결성하고 포항문인협회를 조직해 문학강연회, 미술전람회 등을 개최해 포항 지역의 문화 창달에 공헌했다. 

이명석 선생의 아들 삼형제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수재들이다. 장남 이진우 변호사는 포항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검사 생활을 시작한 후 서울고검 검사로 퇴직했다. 11·1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차남 이태우 사장은 포항고와 고려대 정경대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현대운수라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삼남이 이대공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포항종합제철에 입사해 홍보실장, 비서실장, 부사장으로서 박태준 회장을 측근에서 보좌했다.

하태환 동지교육재단 설립자(1916~1991)는 성장기의 어려움을 딛고 일본에 유학해 입명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귀국해 포항여중에서 교편을 잡다가 광복 후인 1946년 대송면 송정리에 동지상업학교(1951년 동지상고로 인가, 1984년 동지종합고등학교로 개편)를 설립했다. 동지(同志)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뜻을 같이하는 친구’라는 뜻으로 지은 것인데 당시 6인의 포항 친구들이 힘을 합쳤다. 동지중, 동지여중, 동지여상, 포항수산초급대(현 포항대)를 잇따라 설립해 오늘날 포항 교육의 뼈대를 세웠다.

포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기업인 중 한 사람이 김용주 전 전남방직 명예회장(1905~1986)이다. 경남 함양 출생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조선식산은행 포항지점으로 발령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포항에서 사업의 기반을 일궜다. 은행원 생활을 정리한 뒤 삼일상회를 열어 수산업과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전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포항에서 수산업이 번성하던 시기였는데, 그는 경비행기를 띄워 어군을 추적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포항제일교회 교인들이 어렵게 꾸려나가던 포항영흥학교를 1935년에 인수해 교사를 새로 지어 교직원을 모집하고 스스로 교장을 맡아 학교를 중흥시켰다. 광복 후 국가에 헌납한 이 학교는 내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흥해읍에서 인물 자랑하지 마라”라는 말도 있어

김용주 회장은 1950년 주일 공사로 부임해 맥아더 원수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인연으로 맥아더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후일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창업하고 경영자총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김회장은 포항에서 출생하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고명딸 김문희씨를 1967년 인수한 용문중고 교장 자리에 앉혔다. 김씨는 현재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김이사장과 남편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작고) 사이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있다. 김용주 회장의 장남이 김창성 전남방직 명예회장이고, 차남은 4선(選)의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부산 남구 을)이다.

포항시 흥해읍은 지방의 소읍에 지나지 않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쟁쟁한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명박(MB) 대통령과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의 고향이 바로 흥해읍 덕성동이다. 여섯 살 차이 나는 형제는 동지중과 동지상고 동문이다. 이상득 의원은 육사에 진학했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중퇴하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의원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평사원으로 입사해 재벌 기업 사장까지 지낸 전문 경영인 출신으로서 1988년 13대 때 민정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18대까지 6선을 기록했다. 당 정책위의장을 두 번 지내고 원내총무에 이어 사무총장까지 역임해 당3역을 모두 거쳤으며 지난 17대 후반기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현재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으로 한일의원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후발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자원 외교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통상적 외교 채널과 별도로 ‘대통령의 친형’이라는 점이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전언이다. 영일 출신으로 동아일보 편집부국장과 한국갤럽 회장을 지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이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MB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흥해읍 용전동이 고향인 이병석 의원은 영흥초등학교-동지중-동지상고-고려대로 이어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직계 후배이다. 대륙연구소 시절 장덕진 이사장을 대부로 모시며 연구이사로 일했고, 대통령 비서실 근무 경험도 갖고 있다. 2000년 16대 국회에 첫발을 디딘 후 17대, 18대에 연속 당선되어 국토해양위원장을 맡고 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흥해 출신 국회의원으로 최원수 제2대 민의원(1912~1989), 최태능 제5대 민의원 의원(1909~1986)이 있다. 정무식 전 의원(1924~1988)은 육사 8기로 중앙정보부 근무를 마지막으로 준장으로 예편해 8, 9대 의원을 지냈다.

김장섭 변호사(1910~1994)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와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지검장으로 검찰을 떠났다. 그는 내무부 차관-농림부 차관을 역임한 후 6, 7대 의원으로 국회 법사위원장까지 지내 지역에서 알아주던 ‘천재’이다. 동해중학교와 오천중학교를 설립했다.

흥해 학성리에서 태어나 동지상고와 수산초급대를 졸업한 이용득 전 포항시의회 의장(1935~1994)은 의정 활동과 각종 사회단체 활동을 통해 지역 발전에 공헌했다.

최상엽 전 법무부장관은 흥해읍 망천리, 최근 퇴임한 이병욱 전 환경부 차관은 흥해읍 양백동이 고향이다. 최상엽 전 장관은 포항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일찌감치 수재로 인정받았으며, 고등고시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해 검사의 길을 걸었다. 대검 차장검사를 끝으로 검찰을 떠난 지 7년 만에 법무부장관에 기용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흥해에서는 이처럼 국회의원뿐 아니라 각계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와 “흥해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마라”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김태현 변호사도 고등학교(경북고)와 대학(서울대 법대)을 다른 곳으로 진학하기는 했지만 부친의 고향이 흥해이고 그가 포항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포항 사람들은 동향으로 친다.

이기택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포항시 청하면 출신으로 포항에서 영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중학교로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났고, 이후 줄곧 부산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성장했다. 이임용 전 태광산업 회장이 자형이다.

5공 시절 이른바 ‘삼허(三許)’ 중 한 사람으로 불렸던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이 권력의 핵심에 들어 있을 때, 그가 포항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을 포항 시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청와대를 떠난 다음 미국 헤리티지연구소에서 5년간 연구에 몰두한 후 귀국해 설립한 현대사회연구소를 지금도 이끌어가고 있으며 14,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포항 출신 기업인이 일궈낸 대표적 기업으로 이원만 전 명예회장이 설립한 코오롱그룹을 들 수 있다. 포항 신광면이 고향인 이 전 회장은 대구로 나가 그곳을 무대로 삼경물산, 한국나이론, 한국폴리에스텔을 차례로 세웠고 국내 화학섬유 개발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코오롱 그룹을 계승한 장남 이동찬 명예회장도 이제는 90을 바라보는 노령이다.

제4기 동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박승호 포항시장은 포항 토박이이다. 서울올림픽조직위에 공채 1기로 입사한 박시장은 당과 청와대를 오가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경상북도에서 일반직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도청 국장과 공무원교육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해 시장에 당선된 그가 올 6월 치르는 제5기 선거에서도 무난히 연임에 성공할 것으로 주위에서는 보고 있다.

포항과 영덕은 40km가량 떨어져 남북으로 인접한 시·군인데 그리 왕래가 잦은 편은 아니다. 영덕군은 강구의 대게로 널리 알려진 지역으로 왕성한 수산업 덕분에 돈줄이 강구로 몰려든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외진 곳이다. 영덕 출신들 스스로가 인물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몇몇 눈에 띄는 대표적 인물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이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영덕농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수재로 미국 유타 대학에서 통계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IT 산업의 중요성에 눈을 떠 귀국해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을 설립했고, 한국데이타통신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해 세차례 연임하는 동안 각종 관련 기술을 국내에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 재단법인 정보문화센터 회장, 한국전자거래표준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삼보컴퓨터를 설립해 국내 퍼스널 컴퓨터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서 성장했던 그는, 현재 퇴계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있으며 숙명학원 이사장직도 맡고 있다.

영어·일어에 능통한 국제금융 전문가로 실력을 인정받았던 전 KB금융지주회사 황영기 회장의 뿌리가 영덕에 있다. 삼성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한 그는 우리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을 거쳐 KB금융지주회사 회장으로 탄탄대로를 걷던 중 불의의 낙마를 하기는 했으나 서울시 장학재단 이사장, 차병원그룹 부회장 등을 새로이 맡으면서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문태준 대한의사협회 명예회장도 영덕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문회장은 환자 진료와 대학 강단에 서는 한편으로 고향인 영덕과 청송·울진에서 7~10대에 걸친 네 차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끈 정치인이었고, 24~26대 대한의학협회장을 지낸 활동가이기도 했다. 보건사회부장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사장,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도 지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기 스타 강신성일씨는 대구에서 출생해 경북중고등학교와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나 원적은 영덕이다. 한창 때 무수한 영화에 출연해 온갖 연기상을 휩쓸다시피 한 그이기에 현재 맡고 있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 자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밖에 한석진 전 외무부 대사, 박종대 전 평화은행장, 김근우 전 강원대병원장, 김창기 CS뉴스프레스 사장, 한영탁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 등이 영덕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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