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는 거창했는데, 세계관은 ‘희미’
  • 이지선 | 영화평론가 ()
  • 승인 2010.04.1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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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이후 세계 그려…액션 돋보이지만 스토리텔링에는 아쉬움 남아

 

▲ 감독 | 앨버트 휴즈, 알렌 휴즈 / 주연 | 덴젤 워싱턴, 게리 올드만


 마야의 달력이 2012년에 끝난다는 이야기 탓에 새로운 종말론이 유행 중인 것일까? 마야의 예언을 증거로 들이밀며 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는 종교가 있는가 하면, 영화계에서는 인류 멸망, 혹은 지구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줄지어 개봉되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2012>나 <더 로드>가 그런 예이다. 그리고 4월15일 개봉하는 영화 <일라이>도 같은 부류이다.

 덴젤 워싱턴과 게리 올드만의 조우가 반가운 영화 <일라이>는, 종말 이후 30년이 지난 세계를 그린다. 어떤 재앙 이후 완전히 폐허가 된 지구,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은 서로를 약탈하고 잡아먹는 비문명 속에 내던져졌다. 물과 식량 그리고 폭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일라이는 그저 무던히 걸으며 서쪽으로 향한다. 종말 이후 사라져 딱 하나 남은 책을 전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주인공 일라이의 여정을 따라 움직인다. 어지간한 액션영화 부럽지 않은 격투·추격·전투 장면을 담고 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과 캐릭터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 사이에서 영화 <일라이>의 차별점을 드러내는 것은 깨끗하게 정돈된 영상과 동양 무술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정체불명의 주인공 그리고 그의 피부색이다.

 칼과 총으로 무장한 채 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라이의 모습은 언젠가 역사 속에서 보았던 칼을 든 순례자(혹은 십자군)를 연상시킨다. 오바마 시대의 영향인지 이채롭게도 검은 피부를 갖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그뿐이다. 문명과 비문명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고, 약탈자와 순례자의 관계는 단선적 선과 악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화의 중간에 어이없이 밝혀지는 책의 비밀은 끊임없는 물음표를 낳는다. 어째서 악당 카네기는 그 책에 집착했는가? 어째서 그 책만 종말과 함께 사라져야 했는가? 어째서 그 책이 인류의 희망인가? 이 모든 의문은 마지막 순간에조차 풀리지 않는다. 영화가 품은 종교와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표피적인 탓이다.

 두 주연 배우의 좋은 연기, 오버하지 않은 배경 음악, 레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영상의 일관된 색감, 잘 짜인 액션 장면은 돋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고민을 심어놓고 제대로 풀지 못한 이야기는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남긴다. 단순한 액션영화로 치부하기 어려운, 거창해질 수밖에 없는 소재를 선택했다면 그에 맞는 세계관을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로, 안쓰러운 영화이다. 4월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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