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군부 숙청’, 민주화 수순인가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3.0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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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모의 혐의로 군 장교 60여 명 무더기 검거…에르도안 총리 중심으로 ‘소련식 개혁’ 추진 전망

 

▲ 2월23일 터키 이스탄불의 법원 입구에서 경찰이 출입문을 봉쇄한 채 법원 내방객들을 통제하고 있다. ⓒAP연합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면서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의회주의 민주 국가이다. 국민의 98%가 무슬림이지만 정치에는 종교가 끼어들지 않는다. 이 세속주의를 수호해 온 것이 군부이다. 군부는 이것을 명분으로 네 번의 쿠데타를 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왔다. 그런 군부가 정계에서 은퇴하는 역사적 사건이 최근에 발생했다. 쿠데타 음모에 관련된 장교들이 체포 또는 구금된 것이다. 그렇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오랜 세월 터키 정치를 좌우하던 군부의 퇴장은 예견된 것이었고, 역사의 사필귀정이기도 하다. 다만, 이로 인해 제기되는 한 가지 의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터키가 군의 입김을 배제한 후,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이며 그 전도는 순탄할까 하는 것이다.

정체성을 둘러싼 터키의 위기는 국경 너머에까지 파장을 일으킨다. 이 나라는 나토 내에서 미국 다음으로 병력이 많다. 지정학적으로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중동과 접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가 그만큼 전략적이다. 또한, 유럽연합(EU)의 후보 회원인가 하면 지난 10여 년간의 경제 성장 덕분에 유럽 7위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있다.

최근의 검거 사태는 1월부터 시작된 정치 드라마의 결정판이다. 발단은 중립적인 중소 신문의 보도에서 비롯되었다. 타라프(Taraf)라는 이 신문은 군부가 2003년 회의에서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문서를 폭로했다. 여행 가방에 들어 있던 이 문서에는 이스탄불에 있는 두 곳의 이슬람 사원을 폭파함으로써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비상 사태를 조성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군부는 문제의 회의가 열렸던 것은 사실이나 외세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을 뿐 쿠데타 모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군 참모총장도 사원 폭파나 거사 음모는 없었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당국은 2주 만에 60여 명의 장교들을 감금했다. 2명의 고위 퇴역 장성도 포함되었다. “이제 군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정치 세력으로서의 군은 궤멸되었다. 군부도 마침내 통제권에 들어왔다.” 한 퇴역 장성은 이렇게 한탄했다.

이것은 엄청난 역사적 변고이다. 현대의 터키는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는 전권을 잡고 주로 문맹자로 구성된 농경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언어와 관습까지 바꾸었다. 사법과 행정 조직을 장악한 군부는 무한대의 권력을 휘둘렀다. “마치 철없는 어린애를 다루듯 터키를 주물렀다”라고 한 교수는 풍자했다. 군부는 “우리 조국, 우리 공화국을 지킨다”라는 명분 아래 민선 정부를 네 번이나 전복했다. 가장 최근인 1977년에도 쿠데타가 있었다.

에르도안 총리가 또 다른 독재 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어

▲ 전·현직 군 지휘관들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된 터키에서 2월25일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왼쪽)가 의회 토론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AP연합

개혁은 터키 종교계를 대표하는 이스탄불 시장 출신의 에르도안 총리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정계의 이슬람 배경을 등에 업은 그는 다소 복합적 노선의 소유자이지만 터키의 EU 가입을 철저하게 추진하는 강직한 정치인이다. 비록 세속주의 제도권에서는 배척당했지만 그가 이끄는 ‘정의개발당’(AKP)은 2007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이 선거 이후 정치에서 군부의 역할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여러 차례 쿠데타 음모가 있었으나 번번이 무위로 끝났다. 국정 장악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현 육군 참모총장도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면서 에르도안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에르도안의 반대자들은 이번 조치를 야당을 침묵시키기 위한 음모로 본다. 3권을 모두 장악한 그의 권력이 견제받지 않는 사태가 초래할 후유증에 대한 우려가 이들을 긴장시킨다. 

에르도안의 배후에는 또 한 사람의 실력자가 있다. 미국에 거주하는 터키계 목사인 이 인물은 이슬람 조직을 이끌면서 경찰과 검찰을 배후에서 장악하고 에르도안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의 유대는 ‘공개된 비밀’로 되어 있다. 대다수 터키인들은 그렇게 믿는다. 이제 에르도안에게 도전할 유일한 세력은 사법부밖에 없다. 이마저도 조만간 총리 지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갈 전망이다. 세속주의에 관한 한 이들 또한 전임자들에 뒤지지 않는다.

에르도안과 잘 지내는 사람들도 그의 독재 성향을 걱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비판하던 한 재벌 총수는 지난해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에르도안에 대한 노골적 비판은 사실상 죽었다.

문제는 에르도안의 당이 민주화되고 있는 세력임에는 분명하나 민주 정당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타라프 신문의 편집인은 현재의 터키 사태를 1991년의 러시아에 비유했다.

말하자면 느리게 진화하는 소련식 개혁 과정이라는 것이다. 권력의 우상들이 하나 둘 무너지면서 비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인 셈이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관계없이 이슬람주의에서 변신한 에르도안 같은 인물이 새로운 터키를 창조할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한 현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EU 가입에 필요한 법안을 저지하거나 비협조적이었던 이전의 세속주의 세력은 자리를 내줄 때가 되었다.

터키는 분명 민주화의 길로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진정한 민주화 세력을 일부나마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권력의 속성일지 모른다.

그러나 앙카라 대학의 바스킨 오란 교수는 이런 우려를 일축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빌려 에르도안 세력이 한때는 이슬람주의자였으나 지금은 부르주아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핏속에 무슬림의 피는 흐르고 있지만, 이슬람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터키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권력 개편을 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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