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5회로 가장 많고 정치인이 가장 적었다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12.2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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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에서 문근영까지’ <시사저널> 20년 ‘올해의 인물’ 분석 / 남산·아파트 등 사물·현상도 3회 선정

1989년 창간된 <시사저널>이 해마다 송년호에서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온 지 올해로 21번째가 되었다. <시사저널>은 올해 21번째 ‘올해의 인물’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선정했다.

지난 20년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대상을 유형별로 나눠보면 개인이 13명으로 역시 가장 많았다. 나머지 7회 중 집단 혹은 조직인 경우가 4회, 인물이 아닌 사물이나 현상인 경우가 3회였다. 인물 가운데서는 법조인이 세 명으로 가장 많았다. 집단·조직까지 포함하면 5회에 걸쳐 선정되었다. 1989년 창간 첫해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이회창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은 ‘대쪽 판사’로 이름을 날리며 법조인으로는 꽤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1997년과 2002년, 2007년 세 차례나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지금은 자유선진당 총재를 맡고 있다.

199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방희선 당시 광주지법 판사는 선정 당시에도 의외의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1992년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던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를 제치고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판사는 이른바 ‘목포경찰서 불법 구금 고발 사건’으로 유명세를 탔다. 목포경찰서가 시국사범 피의자를 3일간 불법 구금한 사실을 알고 방판사가 문제를 제기하자, 법원이 그에게 지방 좌천 등 인사상의 불이익을 내린 것이 빌미가 되었다. 이에 방판사는 대법원장에 대한 헌법소원을 내면서 법조계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아’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결국 그는, 법복을 벗고 변호사의 길을 걷다 현재는 동국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방판사를 놓고 다시 한 번 작은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지난 3월 ‘신영철 대법관의 e메일 파문’을 주제로 한 MBC <100분 토론>에 패널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신대법관을 옹호하는 측에 서서 “법원장은 선배 법관으로서 후배 법관이 법리를 너무 이탈하거나 황당한 재판을 하면 ‘당신 재판이 좀 이상하다’거나 ‘당신의 개성이 법의 일반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라는 입장을 밝혀 참석자들로부터 “과거 개혁 성향에서 후퇴한 것이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96년에는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와 참여연대 등을 제치고, 사법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인권 신장과 인본주의적 법치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라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1999년에는 ‘홈런 타자’ 이승엽 선수를 제치고, 최병모 옷로비 특별검사팀이 선정되었다. 헌정 사상 최초의 특검팀이자, 역대 특검팀들 가운데 비교적 성공한 팀으로 평가받은 것이 주목되었다. 2003년에는 법조인끼리의 경합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숱한 화제와 인기를 불러 모았던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불법 대선 자금 수사로 ‘국민 검사’라는 인기를 누렸던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격돌했던 것. 올해의 인물에는 안부장이 선정되었다.

정치인으로는 1995년에 선정된 조순 서울시장과 2007년에 선정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등 두 명이 있었다. 정치가 우리 사회에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올해의 인물’에서는 정치인의 인기가 상당히 없는 편이다. 조시장은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불법 정치 자금을 폭로한 박계동 민주당 의원을 누르고 선정되었다. 부활한 민선 시장 1호 주인공이라는 점과 ‘포청천’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다. 이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은 올해의 인물에서 제외한다는 과거의 관례를 깨고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국외 인물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유일

문화예술인으로는 임권택 감독(1993년)과 탤런트 문근영(2008년)이 선정된 바 있다. 임권택 감독은 1993년 당시 영화 <서편제>를 연출해 ‘국민 감독’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역시 ‘국민 여동생’이라는 호칭을 얻은 문근영은 지난해 소리 없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기부 천사’로 각박한 우리 사회에 훈풍을 불어넣었던 것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1년 ‘한국 영화 열풍 현상’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것까지 포함하면 문화예술계에서는 모두 3회에 걸쳐 선정의 영광을 안은 셈이다. 2001년 한국 영화계는 2백50만 관객을 동원한 <친구>를 비롯해 <엽기적인 그녀>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등이 할리우드 영화를 잠재우고 흥행 순위 1~4위를 싹쓸이할 정도로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했다.

경제인으로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98년)이, 체육인으로는 차범근 감독(1997년)이 한 차례씩 선정된 바 있다. 정명예회장은 소 떼를 몰고 방북하면서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공로를 인정받았다. 차감독은 한국 축구를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업적을 평가받았다. 과학기술인으로는 2004년 황우석 당시 서울대 교수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황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이 불거지면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MBC <PD수첩>이 이듬해인 2005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밖에도 1990년에는 이문옥 전 감사원 감사관이, 1991년에는 최열 공해추방운동연합 의장이 각각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이 전 감사관은 1990년 5월 당시 23개 재벌 계열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이 43.3%라는 감사원의 ‘감사 자료’를 언론에 제보해, 은행감독원이 발표한 30대 재벌 5백20개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이 단 1.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뒤엎은 바 있다. 최열 의장은 환경운동연합 고문과 환경재단 대표 등을 지내며 오늘날 국내 환경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국외 인물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유일하다. 그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우리 앞에 다가왔다. 활기차면서도 자신감 있고 유머러스한 그의 말투와 행보는 당시 남한 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일 월드컵과 16대 대선 그리고 효순·미선 양 추모 촛불 집회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2002년에는, ‘행동하는 네티즌’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광화문 광장에 나와서 몸소 시민광장 문화를 주도했던 네티즌은 당시 사회상의 상징적 코드였다.

남산(1994년)과 아파트(2006년)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것도 이채로웠다. 서울을 상징하는 남산은 개발 열풍에 시달리며 몸살을 앓아오다가, 1994년을 기점으로 자연을 회복하며 시민들의 품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점이 선정 이유로 꼽혔다. 아파트 역시 지난 2006년 급격한 가격 폭등으로 그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뒤흔들며 서민들의 가슴을 조이게 했다는 이유에서 올해의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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