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움직이는 3대 정파의 ‘용틀임’
  • 소준섭 | 국제관계학 박사 ()
  • 승인 2009.12.2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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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당·상하이방·공청단, 서로 견제하며 경쟁…상호 교대 형식으로 주석직 올라

▲ 12월17일 이명박 대통령이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왼쪽)을 청와대로 초청해 환담하고 있다. 시진핑은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연합뉴스


지난 12월16일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은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유력한 중국 지도자로 꼽힌다. 그에 대한 예우가 국가원수급에 해당하는 것이 상징적이다. 방한을 계기로 시진핑과 중국 지도자 그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는 과연 차기 중국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인가. 중국 정치를 움직이는 3대 정파인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을 해부하고 중국 지도자들의 현재를 짚어보았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의 25명 구성원 중 거의 절반은 혁명 원로의 아들이거나 사위이다. 이들 중국 공산당 원로 간부들의 자제들은 이른바 ‘태자당(太子黨)’이라고 불린다. 후진타오 주석의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는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역시 태자당의 일원이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勛)은 중국 공산당 원로로서 일찍이 전국인민대회(약칭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의 측근이었다. 태자당의 주요 인사로는 시진핑 외에도 중국 혁명 원로 보이보어(薄一波)의 아들로서 현재 충칭 시 서기인 보시라이(薄熙來), 혁명 원로 왕전(王震)의 아들로서 현재 중국 국제신탁투자공사 이사장인 왕쥔(王軍), 쩡산(曾山)의 아들로서 전 부주석이었던 쩡칭훙 그리고 현재 상하이 시 서기인 위정성(兪正聲) 등이 있다.

 특히 시진핑에 이어 상하이 시 서기에 임명된 위정성(兪正聲)은 태자당의 핵심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ㄱㅡ의 할아버지 위밍전(兪明震)은 20세기 중국 문학의 거장 루쉰(魯迅)의 스승이었고, 아버지 위치웨이(兪啓威)는 중국 제1기계공업부 부장과 톈진 시장을 지냈다. 한때 마오쩌뚱의 처 장칭(江靑)과도 결혼했다. 어머니는 ‘베이징일보’ 사장이었다. 위정성 본인은 덩샤오핑의 총애를 받았다. 시진핑과 함께 국무원 부총리 왕치산(王岐山)과 중국인민은행행장 저우샤오촨(周小川)은 칭화대학교 신세대 태자당으로 불린다. 왕치산의 장인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던 야오이린(姚依林)이고, 저우샤오촨은 기계공업부 부장을 지냈던 저우젠난(周建南)의 아들이다.

 한편, 시진핑은 상하이 당서기를 맡으면서 상하이방의 깊은 인맥 및 ‘장쩌민 일가의 태자족’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상하이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서 장쩌민 일가의 태자당과 상하이방 정부가 관상(官商) 관계를 성공적으로 운용하면서 발전해 온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역적 토대를 둔 상하이방은 중국 공산ㄷㅏㅇ 내의 한 비공식 계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톈안먼(天安門) 사건 후 중국 지도부에 대한 조정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그 수뇌인 장쩌민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주요 구성원은 상하이 시 지도 간부에서 당 중앙 및 정부 고위층으로 옮겨간 인물이나 혹은 장쩌민 주석 시기에 기용된 인물들이다. 상하이방은 현재까지도 중국 중앙정치국에서 많은 주요 직위를 차지하면서 후진타오 주석에 대한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상하이방의 주요 인물은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 자칭린(賈慶林) 전국정협(政協) 주석, 리장춘(李長春)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周永康)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이밖에 류치(劉淇) 베이징 시 서기, 장더장(張德江) 국무원 부총리, 류윈산(劉雲山) 중앙선전부 부장, 후이량위(回良玉) 국무원 부총리, 화젠민(華建敏)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뤄간(羅干) 등이 있다. 물론 장쩌민의 퇴임과 함께 상하이방의 영향력도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후진타오를 정점으로 하는 공청단파, 고학력에 논리·사유 능력 뛰어나

2006년 9월 상하이방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천량위 상하이 시 서기가 부패 혐의로 구속된 사건을 두고 해외 언론들은 후진타오를 정점으로 하는 ‘공청단(共靑團)’이 반부패를 명분으로 상하이방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었다.

 원래 장쩌민 전 주석이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했던 인물은 공산당 제16기 최연소 상무위원이었던 리장춘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리장춘의 건강 문제와 함께 허난 성 성장으로 재직할 당시 헌혈 및 매혈로 인해 에이즈가 창궐함에 따라 그 구상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상하이 서기 천량위의 부정 부패 사건이 불거지면서 상하이방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후진타오는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하여 구 세력을 축출하고 연부역강한 자파 신진 인물들을 속속 요직에 배치하면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리커창(李克强) 후계 구도를 가시화시켜나갔다.

 위기에 몰린 상하이방이 내놓은 카드가 바로 시진핑을 후계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원래 계파 색채가 약한 인물로서 자신의 실력만으로 ‘천하’를 얻기에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상하이방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였다. 그러한 시진핑을 후계로 내세우면서 상하이방은 후진타오, 리커창, 시진핑이라는 치열한 3자 대결 구도를 만들어 상하이방에 대한 후진타오의 공세를 둔화시키고 3자 간 상호 불신을 유도하면서 경쟁시키고자 했다. 이와 함께 자신의 근거지인 상하이에는 자파의 유망주인 위정성을 서기로 앉혀서 온전하게 관리시키는 방책을 구사하고자 한 것이다(상하이 시 당서기라는 자리는 태자당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는 데 중요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공청단파(共靑團派; 중국 공산당청년단 세력)’는 2002년 주석의 자리에 오른 후진타오와 함께 떠오른 비공식 계파이다. ‘공청단’이라는 말은 후야오방(胡燿邦) 시기에 처음으로 출현했는데, 당시 당 원로들은 제1서기를 맡고 있던 후야오방이 ‘단파(團派; 공청단파)’를 중용했다고 비판했고, 이때부터 ‘공청단파’, 혹은 ‘단파’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바로 후진타오 현 주석이 후야오방 시기에 공청단 중앙 제1서기를 맡고 있었다.

 ‘공청단파’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개 고학력으로서 논리와 사유 능력이 뛰어나며 신중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실제 행정 경험이 취약해 정책을 기획·실행하는 면에서 약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특히 이들은 상하이방이나 태자당과 달리 소수를 제외하고는 고위간부의 자제나 기타 화려한 배경이 없이 대부분 평민 출신이다. 티베트나 신장 그리고 간수 성 등 중국 빈곤 지역에서 행정을 펼친 경력을 갖고 ㅇㅣㅆ다. 이러한 출신 및 성장 배경을 반영해서인지 이들의 정치적 주장은 빈부 격차 축소, 빈곤 지역 배려, 고소득 계층 억제, 사회의 균형발전 등으로 요약되며, 이러한 일종의 ‘친서민 성향’ 측면에서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혹은 프랑스의 사회당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환경 보호 문제에 있어서도 후진타오를 비롯한 공청단파는 환경 보호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시각이 강한 데 반해, 상하이방이나 태자당 그룹, 특히 해외 유학파 그룹으ㄴ 환경 보호보다 경제 성장에 중점을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 공청단파의 주요 인물은 랴오닝성위원회 서기인 리커창, 윈난성 부성장인 친광룽(秦光榮), 광둥성 성장 황화화(黃華華), 광둥성위원회 부서기 류위푸(劉玉浦), 신장자치구 구위(區委; 구위원회) 서기 왕러취안(王樂泉), 시짱자치구 구위 서기 장칭리(張慶黎) 등이다.  

계파 색채 약한 시진핑, 차기 주석 유력하나 아직 갈 길 멀어

▲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장쩌민 전 주석(가운데),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왼쪽)이 중국 건국 60주년 국경일 전날인 9월30일 저녁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열린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7년 가을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7 전인대회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은 9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중앙서기처에 각각 서열 6위와 7위로 진입함으로써 일약 중국 최고 지도부로 발돋움했다.

 시진핑은 32세의 젊은 나이에 푸젠(福建) 성 샤먼 시 부시장에 임명된 후 승승장구했다. 2007년에는 불과 반 년 만에 3계단이나 뛰어올라 저장 성 당서기, 상하이 시 당서기, 중국 공산당 서기처 서기라는 일약 중국 최고 직무의 제1 순위 후계자가 되었다. 시진핑은 인간관계가 좋고 이미지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외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미국의 폴슨 전 재무장관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사이이다. 더구나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당 원로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으며, 군부에도 튼튼한 기반을 지니고 있다. 군부 기반은 그가 일찍이 국무원 부총리 ㄱㅕㅁ 국방부장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근무하는 등 군 경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특히 그의 아내 펑리위안(彭麗媛)이 군 문선대(文宣隊)의 유명한 가수라는 점이 합쳐진 결과이다.

시진핑의 ‘유일한’ 라이벌로 손꼽히는 인물은 리커창이다. 1980년대 당시 중국에서 사상의 자유가 가장 활발하게 펼쳐졌던 베이징 대학의 학생회 대표로서 학생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한 ㄱㅓ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여전히 중국 정계 내 개혁파와 온건 지식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특히 그는 허난 성 성장으로 재직할 때 각종 청탁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모두 베이징에 남겨 두고 단신으로 부임했다. 공적 업무와 관련이 없는 어떠한 연회에도 가지 않으면서 비서와 단둘이 집에서 밥을 지어먹을 때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가 허난 성에 있을 때는 관내에서 에이즈가 창궐해 고ㄴ경에 처했고, 또 랴오닝성에 재직할 때에는 대형 광산 사고를 비롯해 나이트클럽 폭발 사고 등 사건이 계속 발생해 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평도 받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 중 정식 위원인 2백4명의 권력 분포는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태자당 그리고 장쩌민을 핵심으로 하는 상하이방이 4 대 2 대 1의 비율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리커창이 시진핑에 비해 일방적 열세 구도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에서 이미 세력 간에 상호 교대 방식으로 주석직을 임명하는 전통이 세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장쩌민을 위시한 상하이방 및 태자당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지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현재 시진핑이 앞서가고 있지만 정권 교체 방식이 정형화되지 않은 중국 정치의 역학 구조상 2012년의 권력 교체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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