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할 이유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9.12.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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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자가 평생 통찰한 생명 현상의 의미 들려줘…노화 현상에 대한 설명도 눈길

노자가 말했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진리를 따르며, 진리는 자연에 있다.”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자로서 평생 생체분자 연구에 매진해 온 생화학자 박상철 교수는 생명 현상을 말할 때 노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대자연에 사계절의 질서와 멋이 있듯이 생명체도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는 엄연한 법칙을 망각하지 말라는 의미에서다.

생명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서’라고 말하는 그는, 순서를 무시하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심과 좌절 모두에 대해 질타한다. 그는 “순서란 바로 ‘길’이다. 생명체는 주어진 길을 한 발자국, 차례차례 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자연이 부과한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 생명은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순서의 근원에 관한 수수께끼는 생명 현상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분자인 DNA 핵산의 염기 서열 구조가 밝혀져 간단히 해결되었다. 생명 정보의 공간상 서열에 문제가 생기면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각종 유전병과 암 등의 병을 유발한다. 또한, DNA에 수록된 정보의 발현도 일정한 수순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상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괴망측한 생명 현상을 접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박교수는 생체 분자들의 특성을 삶의 모습에 빗대 설명한다. 우선 생명체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짝을 이룬다는 특성이 흥미롭다. 사람들이 인연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생체 분자들도 가장 어울리는 짝을 만났을 때 구조적으로 안정되고, 고유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아무리 중요한 분자라도 제 짝을 만나지 못하면 전혀 의미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라고 말하며, 단백질의 선택에서부터 항원·항체 간의 결합 등을 설명했다. 어떤 만남에서건 그것이 인연이라면 결코 한쪽만이 강할 수 없고, 반드시 서로 대등하게 어우러진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생명 현상에서 배울 수 있다. 박교수는 또, 생체 분자들이 구조적으로 주어진 순서에 따라 공유하고 결합해 중합체를 이루는 점을 들어 ‘협동’하는 것이 인류의 참모습이라고 전했다.

박교수가 설명하는 내용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늙는다는 것은 병이 아니다’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늙어가는구나’ 하고 푸념하는 사람이라면 새겨들을 만한 내용이다. 박교수는 단순한 연령의 증가가 노화의 지표가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늙어가는 속도는 개인마다 다른데, 그것은 개인의 유전적 요인, 생활 패턴, 질병 상태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비록 여든 살이지만 신체 건강 상태는 40대 못지않은 사람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박교수는, 피부에 주름살이 증가하고 체온 보호 효과가 저하되며, 시력과 청력이 감소되고 근육의 운동 효율이 저하되는 등 이른바 노화 현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에 절망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신체적 변화에 생체가 적응해 ‘보상성 변화’가 유도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것은 생체 기능의 저하에 대응해 생명을 보위하려는 적응 현상이 늙어가는 모습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화 현상은 죽음의 전 단계가 아니라 자기 보호적 변화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생체 변화를 병적 현상으로 오해하지 말고 저하된 기능이라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한다면 노후 생활을 젊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않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박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오래된 가요의 한 구절이 새삼 와 닿는다.


ⓒ위즈덤하우스
방송사의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시사평론가 정관용씨가 토론 프로그램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토론의 현장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불통’의 현장을 국민에게 보여준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씨는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위즈덤하우스 펴냄)에서 생각과 주장을 ‘내지르는’ 데 익숙해 다른 견해를 경청하는 데 서툴고 비판의 목소리에는 공격을 당한 것마냥 발끈하는 우리 현실을 지적했다.

생방송 토론 현장에서 정씨는 출연자 두 사람을 각각 ‘교수’와 ‘박사’라고 불렀다가 곤혹을 치렀다. 대학 강의를 하지만 정식으로 교수 임용이 되지 않은 출연자를 ‘박사’라고 불렀던 것인데, ‘교수’측에서 “나도 박사인데 왜 저 사람만 박사라고 부르냐”라고 항의했던 것이다. 정씨는 이 사건을 출연자와의 단순한 의견 충돌로 보지 않았다. 호칭 문제 하나를 놓고도 판단 기준이 다른 우리 사회 불통의 단초를 발견한 일화라는 것이다.

정씨가 지적하는 것은, 서로 ‘소통’하기는커녕 상대방을 ‘소탕’하려는 태도이다. 우리 사회가 왜 소통이 안 되는지, 왜 소통을 못하는지 그 이유가 이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정씨는 “토론을 이기고 지는 관계로 규정하는 것, 상대방을 꺾어 눌러야 토론을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 가시 돋친 독설이 난무할수록 활기찬 토론이었다고 평가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토론할 때 상대방 생각을 바꿔놓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방송 토론의 해악이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흑과 백이 격렬하게 섞여 만들어진 회색의 영역에 바로 소통의 비밀이 숨어 있다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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