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장미란이 들어올린 것은 ‘역사’였다
  • 신명철 | KBS 인스포츠 편집위원3 ()
  • 승인 2009.12.0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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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도의 전통 잇고 한국 여성 스포츠의 힘 확인시킨 쾌거

▲ 11월28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역도경기장에서 장미란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달성한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림픽 챔피언 장미란(26·고양시청)이 또다시 세계를 들어올렸다. 그냥 들어올린 것이 아니다. 세계신기록과 세계선수권대회 4연속 우승을 덤으로 얹어서 들어올렸다.

장미란은 지난 11월28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09 세계역도선수권대회 여자 75kg 이상급 경기에서 인상 1백36kg과 용상 1백87kg(종전 세계신기록 1백86kg), 합계 3백23kg을 기록해 용상과 합계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이로써 장미란은 2005년 이후 세계선수권대회 4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지난해에는 올림픽이 열려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 국기인 태권도를 빼고 한국 선수가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연속 우승한 것은 장미란이 처음이다. 남자 유도의 전기영이 1993년(78kg급)부터 1997년(86kg급)까지 체급을 올려가며 3연속 우승한 것이 세계선수권대회 연속 우승의 대표 사례이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다 장미란을 앞세워 되살아나고 있는 역도는 한국 스포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국 스포츠가 국제 무대에서 처음으로 얻은 메달이 역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김성집 전 태릉선수촌장은 한국이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출전한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미들급에서 첫 올림픽 메달(동)의 기쁨을 해방된 국민들에게 안겼다. 김 전 촌장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또다시 동메달을 차지했다. 김 전 촌장은 한국 스포츠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때인 1976년부터 1985년까지 태릉선수촌을 밤낮으로 지킨 것을 시작으로 세 차례나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살폈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는 김창희가 역도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라이트 미들급의 김성집과 밴텀급의 유인호 등 5명이 금메달을 목에 걸어 한국이 첫 출전한 이 대회에서 일본과 필리핀에 이어 3위를 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 무렵 역도는 복싱과 함께 국제 대회에서 효자 종목이었다. 한국 역도는 1960년대 이후에도 아시아 무대에서는 여전히 강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세계 무대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전병관이 은메달(52kg급)을 딸 때까지 이렇다 할 전적을 올리지 못했다. 전병관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56kg급에서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해 한국 역도의 숙원을 풀었다. 세계 무대에서 침체를 겪는 동안에도 한국 역도는 꾸준히 실력을 키웠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원신희는 한국 역도의 희망이었다. 원신희는 1964년과 1965년 인상과 용상, 종합 그리고 1972년 뮌헨올림픽을 끝으로 폐지된 추상(推上) 등에서 세계 주니어 신기록을 잇달아 세웠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때 원신희는 당연히 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5위에 그쳤다. 그리고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는 인상과 용상에서는 2위권을 달렸으나, 취약 종목인 추상에서 실패해 7위에 머물렀다. 올림픽에서는 합계 기록으로만 시상한다. 그러나 원신희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 라이트급에서 인상과 용상 그리고 합계 등 3개의 금메달을 따 한국이 아시아경기대회에 처음 출전한 북한을 금메달 숫자에서 16대 15로 아슬아슬하게 물리치고 종합 4위를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제 한국 역도의 전통을 장미란이 이어가고 있다. 장미란은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 선수가 출전하지 않은 가운데 합계 3백26kg의 세계신기록(인상 1백40kg, 용상 1백86kg)으로 가볍게 우승했다. 올림픽에서 태권도는 남녀 8체급 가운데 특정 국가가 남녀 각 2체급씩 4체급만 출전하게 되어 있다. 여자 역도는 7체급 가운데 4체급만 출전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메달 독식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여기서 특정 국가는 한국(태권도)과 중국(역도)이다. 장미란의 급성장세를 의식한 중국은 해당 종목 최강자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최중량급의 출전을 포기한 것이다. 

11월 마지막 주에는 장미란의 금메달 소식 외에 신인왕 등 올 시즌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3관왕에 빛나는 신지애(21·미래에셋)가 금의환향하며 다시 한 번 여자 스포츠 바람이 불었다.

여건 미비로 출발 늦었던 여성 스포츠의 독기 어린 ‘도전과 응전’

ⓒ시사저널 이종현

여기서 스포츠 관련 통계 하나를 소개한다. 한국이 그동안 출전한 하계·동계 올림픽은 각각 15차례이다. 1980년 모스크바 하계대회와 1952년 오슬로 동계대회는 정치적인 이유 또는 국내 사정으로 불참했다. 30차례 올림픽에서 한국은 8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가운데 여자가 35개를 따 41.2%를 차지하고 있다. 하계 올림픽 금메달 68개 가운데 여자는 27개(1996년과 2008년 배드민턴 혼합복식은 0.5개씩 계산)이고, 동계 올림픽 금메달 17개 가운데 여자는 절반에 가까운 8개이다. 한국 여성 스포츠가 사회·문화적인 여건 때문에 남성 스포츠보다 출발이 늦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올림픽이 아닌 특정 종목의 예를 들어보면 농구의 경우 여자는 1967년과 1979년 두 차례 세계선수권대회 2위 그리고 1984년 한 차례 올림픽 은메달에 빛나지만, 남자는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 11위가 가장 좋은 성적이다. 30여 년 전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1970년대 초반 여자배구 대표팀은 훈련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이따금 태릉선수촌에서 나와 서울 시내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곤 했다. 훈련 파트너로는 배구 명문 대신고가 주로 나섰다. 연습 경기는 10세트로 진행되었다. 살인적인 훈련량이었다. 세트를 내주면 강한 체력 훈련이 뒤따랐다.

블로킹 훈련 때는 손가락에 오자미를 달고 뛰어올랐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도 여자배구 대표팀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4위에 그쳤다. 하지만 4년 뒤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 유경화, 유정혜 등 12명의 선수들은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여자 올림픽 메달(동)이자 구기 종목 첫 메달의 영광을 누린다. 한국 여자 스포츠의 힘이다. 장미란은 이런 한국 여자 스포츠의 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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