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뜯는 결혼, 동성까지 노린다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9.11.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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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수법 갈수록 지능화해 국내에서도 피해자 속출…온 가족이 총동원된 경우도

▲ 인터넷 채팅 사이트를 통해 익명의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결혼 사기가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시사저널 임영무

일본처럼 살인 사건까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인터넷 결혼 사기를 비롯한 각종 결혼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백지가 진짜 돈이 된다는 일명 ‘네거티브 머니’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남장 여성이 주부를 감쪽같이 속여 6개월간 연애를 하기도 한다. 가족이 총동원되어 결혼 사기를 부추기기도 하며, 유부녀가 서류를 조작해 미혼녀 신분으로 국제결혼에 골인하기도 한다. 감정의 벽이 쉽게 허물어지는 결혼을 미끼로 접근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인터넷 결혼사이트의 급증과 경기 불황이 겹치면서 결혼 사기가 더욱 활개를 치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다.

지난 11월18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구속된 프랑스인 A씨(69)와 카메룬인 B씨(39)의 결혼 사기 행각은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이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한국 여성에게 결혼하자며 접근했다. 김씨가 결혼을 승낙하자 패물과 현금이 세관을 통과하는 데 돈이 든다는 명목으로 2천만원을 뜯어냈다. 이들은 추가로 돈을 더 뜯어내기 위해 김씨를 만나 백지에 특수 용액을 발라 돈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일명 네거티브 머니라고 하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김씨의 신고로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의 특성 때문에 남장 여자 혹은 여장 남자가 동성을 상대로 결혼 사기를 벌이는 사례도 있다. 30대 주부인 윤 아무개씨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지난해 6월, 이 아무개씨(여·39)를 만났다. 채팅으로 대화만 나눴기 때문에 윤씨는 자신을 남성이라고 소개한 이씨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한 달 뒤, 이들은 실제로 만났다. 이씨의 외모가 워낙 남자다운 데다가 남동생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남자 행세를 해 윤씨는 속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성관계를 맺을 때에도 몰랐다. 이씨의 요구로 기구를 사용해 성관계를 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결혼해서 이민을 가자며 윤씨를 속인 뒤 신용카드 4장을 받아냈고, 6개월 만에 1억7천3백만원을 탕진했다. 그런 뒤 잠적했다. 윤씨의 신고로 지난 10월, 이씨는 경찰에 붙잡혔다. 윤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씨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반대로 여장 남자에게 당한 농촌 총각도 있다. 이들 역시 인터넷 채팅 사이트를 통해 만났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문 아무개씨(35·남)는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는 농촌 총각 황 아무개씨(40)에게 미녀 사진을 이용해 여자로 행세하며 접근했다. 지난해 5월, 문씨는 황씨와 결혼을 약속한 뒤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황씨는 문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5천만원을 덜컥 빌려주었다. 문씨는 돈을 뜯어내자 바로 잠적했다. 경찰은 1년간의 수사 끝에 지난 10월, 문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황씨처럼 상대방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거액의 돈을 빌려주는 피해 사례는 의외로 빈번하다. 지난 11월14일, 경찰에 붙잡힌 허 아무개씨(38)는 채팅과 전화로만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남성으로부터 7천만원을 뜯어낸 혐의를 받고 있다. 유부녀인 허씨는 채팅을 통해 만난 최 아무개씨(45)에게 미혼이라고 속였다. 최씨의 호감을 사기 위해 친구 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라고 소개했다. 허씨는 90kg의 거구인 데다 치아가 고르지 못해 인상이 좋지 않았다.

최씨는 허씨가 보내준 사진을 철석같이 믿었고 결혼도 약속했다. 그때부터 허씨가 돈을 요구했다. 최씨는 무려 1백52차례에 걸쳐 7천만원을 빌려주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 서부경찰서 경제수사팀 정의충 경위는 “남자들이 의외로 어수룩하다.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덮인다고 하는데 귀에도 콩깍지가 덮인다. 사기꾼들의 현란한 말솜씨에 한 점 의심 없이 돈을 빌려준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개인 문제로 치부하는 탓에 소송·처벌도 어려워

▲ 국제결혼이 급증하면서 결혼 사기 피해자도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다. 위는 국제결혼 모습(기사 내용과는 관련 없음). ⓒ연합뉴스

온라인을 통한 결혼 사기가 가장 빈번하지만, 오프라인에서도 사기 행각은 이어진다. 상대방이 솔깃할 만한 직업과 집안 배경을 내세우며 허세를 떠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한다.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미혼 남녀의 심리를 파고든 탓에 의외로 쉽게 범행이 이루어진다.

재력가로 보이는 고객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백화점 직원이 6억원에 달하는 백화점 상품권을 편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 백화점에서 14년간 성실히 근무하던 이 아무개씨(41)는 재력가로 보이는 고객의 딸과 두 달 만에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고객은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면 별장을 10억원에 매입해달라고 이씨에게 요구했다. 급한 마음에 이씨는 백화점 상품권을 판매용으로 배당받아 환전한 뒤, 고객에게 6억원을 건넸다가 사기를 당했다.

서울대 의대생이라고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일가족이 총출동한 경우도 있다. 직업 없이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김 아무개씨(30)는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박 아무개씨(30)를 만났다. 김씨는 박씨에게 서울대 의예과에 재학 중이며, 외조부는 강북삼성병원장을 지낸 의사라고 속였다. 김씨의 부모님은 돈이 필요하자 아들의 여자친구인 박씨를 이용했고, 6천만원 상당을 뜯어냈다. 박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김씨 가족은 가짜 서울대 의대 성적표까지 만들어 보여주면서 사기 행각을 이어갔지만 지난 3월, 경찰에 덜미를 잡혀 가족 모두 사기 전과자가 되었다.

국제결혼이 급증하면서 사기를 당해 냉가슴을 앓는 피해자들도 부지기수로 늘고 있다. 국제결혼 피해자 공동모임 카페를 운영하는 김 아무개씨(45)는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1만명은 족히 넘을 정도로 피해자가 넘쳐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올해 8월, 유부녀인 베트남 여성을 신부로 맞이했다. 결혼 중개업자가 베트남 대사관과 짜고 서류를 조작했기 때문에 김씨는 감쪽같이 속았다.

우연히 그녀가 유부녀인 것을 안 김씨는 직접 베트남으로 가서 동분서주한 끝에 증거 자료를 확보해 지난 10월 혼인 무효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김씨는 “증거 자료를 모으기 위해 두 번이나 베트남을 다녀오면서 쓴 경비만 5백만원에 달한다. 직장도 그만두었다. 결혼 업체에게 지불한 1천2백만원까지 합치면 2천만원 정도를 허공에 날려버렸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올해 9월, 중국 여성과 결혼한 조 아무개씨(43)는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중국 여성이 조씨에게 수면제 네 알을 먹이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조씨는 “신부에게 쓴 돈도 수천만 원이나 되지만 그것보다도 나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 화가 치밀어오른다. 살인 미수나 사기죄로 형사 처벌을 받게 하고 싶지만, 경찰은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만 보이고 있다”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국내외 결혼 사기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다. 결혼 사기를 개인 간의 문제로 치부하는 탓에 형사 처벌이나 민사 소송이 쉽지 않다. 결혼중개업체 듀오 홍보팀 양민희 주임은 “당사자가 배우자의 신분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배우자 동의를 받아 구청이나 회사 등지에서 증명서를 떼어보는 것으로 결혼 사기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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