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길목에 우뚝 솟은 ‘장밋빛 도시’
  • 이종호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문위원 ()
  • 승인 2009.11.24 15: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라비아 반도 고대 유목민들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

▲ 한 남자가 낙타를 타고 페트라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1812년 8월 스위스 육군 대령의 아들인 27세의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n Ludwig Burckhart)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한 무리의 아랍인들과 함께 동요르단 지방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가던 아랍인이 근처 산에 장엄한 폐허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이 유적을 보고 싶어, 가는 도중에 있는 아론(모세의 형.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죽은 자리에 묘를 만들었다고 함)의 묘를 참배하고 싶다고 했다. 대장이 그의 참배를 허락해 험한 협곡을 지나 산 정상에 올랐는데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붉은빛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빨간 장밋빛 도시’의 발견자라는 명예를 붙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영국 시인 딘 버건은 페트라를 두고 ‘영원의 절반쯤 되는 장밋빛 붉은 도시’(rose-red city)라고 칭송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곳을 ‘에돔의 셀라’라고 불렀는데 히브리어로 셀라는 바위라는 뜻이다. 페트라 역시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사해와 아카바 만 중간에 위치한 페트라는 기원전 4백년쯤에 아라비아 반도에 정착한 유목 민족 나바테아인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수도였다. 페트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페트라의 인구는 3만명을 넘었다. 페트라에는 포장도로, 목욕탕, 상점, 극장(2개), 장터(3곳), 궁전, 체육관, 계단식 정원 등이 있었다. 전성기 때 페트라와 연계되는 주변 지역에는 무려 50여 만명이 거주했다. 페트라가 번성하게 된 요인은 물이다. 사막 지대에서 물은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인데 페트라는 각지에 빗물을 받아 저장할 수 있는 테라코타로 만든 정교한 배수 시설을 설치했다. 현재도 구조를 볼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많다.

요르단 박물관의 아마르 박사는 페트라 안에만 2백여 개의 저수 시설이 있는데, 이곳의 저장량은 약 4천1백60만ℓ에 달해 10만명이 1년 동안 사용해도 충분한 양이라고 말했다. 성경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치자 물이 솟아나 12개의 샘이 솟았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으로 아직도 인근에 모세가 찾았다는 샘이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페트라의 암석은 파내거나 조각하기 수월한 사암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페트라에서는 바위를 깎아 무덤과 주거지를 만들었는데 현재 8백개의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었다. 도시 길이는 8km에 달하며 시가지 입구는 동쪽의 시크, 남쪽의 투그라, 북쪽의 투르크 마니에라라는 세 개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대인들을 감탄하게 하는 것은 장밋빛 사암을 새겨 만든 신전과 무덤의 정면부인 카즈네피라움(Khazneh Fir’awn, 파라오의 보물)으로 시크를 통과하자마자 6개의 원형 기둥이 있는 2층 구조이다. 페트라인들은 붉은 사암에 높이 40m, 너비 28m의 정면부를 예술적으로 아주 화려하게 새겨놓았지만 내부는 너무나 소박하고 간소하게 꾸몄다.

건축 방법은 정면에서 굴을 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천장에서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깎아내렸는데 그 공간이 무려 1천7백㎥나 된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조각된 것이다. 원래 건물 자체에 파라오의 보물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베두인들은 페트라 안의 기둥에 있는 커다란 화병 조각 속에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보물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해 이 건물은 보물 창고가 아니라, 아마 나바테아 왕 하리스 4세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3> <트랜스포머>의 배경 되기도

▲ 페트라의 보물 창고로 알려진 카즈네피라움. ⓒ연합뉴스

카즈네피라움에서 협곡을 따라가면 열주대로의 서쪽 끝에 신전 카스르알빈트피라움(Qasr al Binr Fir’awn, 파라오 딸의 성(城)이라는 뜻)이 있다. 바위를 깎지 않고 만든 유일한 건물로 이 도시의 주신(主神)인 두샤라를 모셨던 곳이다. 본전은 높이 23m로 열주랑·전실(前室)·지성소로 이루어져 있고, 신전 앞뜰에는 야외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두샤라 신은 처음에는 돌기둥 모양을 했다가 나중에는 인물 모양의 숭배상으로 기려졌다.

카스르알빈트피라 우측에는 2세기 초에 나바테아인들이 건설했지만 훗날 이곳을 지배했던 로마인들이 확충한 너비 40m, 33개 계단으로 된 극장 유적이 남아 있다. 바위산을 반쯤 깎아 움푹하게 만든 건축물로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약 6천명의 인원을 수용했다.

도시의 서쪽 끝에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장례사원인 앗데이르(ad-Dayr, 수도원) 유적이 나온다. 카즈네피라움과 마찬가지로 암벽을 깎아서 만든 2층 건축물로 높이 50m, 길이 45m이며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더 웅장한 규모이다. 1세기말 오보다스 왕에게 바쳐진 신전 또는 무덤으로 추정되며 4세기부터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계단 길은 좌우에 무덤과 제물을 봉헌하는 벽감들이 줄을 이어 있으므로 일종의 ‘성스러운 길’로 통한다. 그러나 ‘유골함이 있는 무덤(Tomb of the Um)’을 비롯해 페트라의 많은 무덤이나 장례 후 연회가 펼쳐졌던 석조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의자가 3면에 달린 식탁이 있는 식당)의 계단 장식은 아시리아 건축 예술이다. 산의 정상에서는 이스라엘 지역까지 보이며, 사해(四海)도 보인다.

106년 로마에 정복당한 후 페트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교의 근거지가 되었지만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 후 이 지역을 동로마가 통치했는데 동로마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페트라보다는 팔미라를 무역의 중심지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페트라 지역은 계속 유목민들의 휴식처로 사용되었는데, 6세기 무렵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주민들이 페트라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1993년에 고고학자들은 6세기 무렵의 파피루스 뭉치 1백50여 개를 발견했다. 이 파피루스에는 데오도쿠스 가문의 7대에 걸친 기록이 들어 있었다. 이 파피루스 속에는 6세기 무렵 페트라 상류층들의 일상생활이 자세히 적혀 있으므로 파피루스의 내용이 알려지면 페트라의 많은 부분이 드러날 것으로 추정한다.

페트라는 지난 2008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부인 카를라 브루니와 주말 여행을 떠난 곳으로 유명세를 탔다. 같은 해 10월에는 성악가 파바로티의 추모 공연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BBC 방송은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50곳’ 중에서 16번째로 페트라를 선정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물론 2007년에 다소 논란 속에 진행된 ‘신세계 7대 걸작품’으로도 선정되었으며, 영화 <인디아나 존스 3(최후의 성배)>와 <트랜스포머>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