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복’ 없으니 충성 경쟁도 후끈
  • 조진범 | 영남일보 정치팀장. ()
  • 승인 2009.11.1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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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사람들 / 친박 그룹, ‘구주류’에서 ‘신주류’로 중심 이동…당 밖에선 젊은 그룹·원로 그룹 물밑 활동

ⓒ시사저널 유장훈


지난 11월10일 국회 의원회관 708호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정희수 의원의 사무실이다. 국회 대정부질문이 끝나고 편안하게 손님을 만나던 정의원은 한 통의 전화를 받자마자 급하게 옷매무새를 고치고 곧바로 708호를 뛰쳐나갔다. 정의원의 이례적인 모습에 의원실은 어리둥절해했다. “도대체 누구 전화이기에 저러시나”라고 물었다.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여비서가 박근혜 전 대표실(545호)에서 온 전화라고 귀띔했다. 의원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바 ‘친박(친박근혜)계’로 분류되는 의원들 대다수가 이렇다. 박 전 대표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간다.

박 전 대표는 국회 대정부질문이 있던 지난 11월5~11일 종종 의원회관에 들렀다. 박 전 대표가 의원회관을 찾으면 사무실의 문은 굳게 닫힌다. 접근 불가이다. 의원회관에 머무르는 동안 박 전 대표는 전문 지식을 갖춘 의원을 개별적으로 ‘조용히’ 부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측근들을 모두 불러 세(勢)를 과시하는 것은 박 전 대표의 스타일이 아니다. 실물에 밝은 인사들을 따로 불러 자문을 받는 정도이다. 누가 박 전 대표의 콜(Call)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보안’이 철저히 지켜지기 때문이다.

“친박 의원들이 박 전 대표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사력을 다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오죽하면 박 전 대표의 외국행에 동행하는 의원들을 ‘로또에 당첨되었다’라며 부러워하겠는가.” 한 친박계 인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친박계 의원들이 하나같이 박 전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기 위해 애쓴다는 말 속에 숨은 뜻은 명백하다. 박 전 대표에게 이른바 ‘심복’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권에 널리 알려진 대로 박 전 대표는 2인자를 두지 않는다. 2인자를 두지 않는 것에 대한 설도 분분하다. 박 전 대표의 용인술로 보는 시각도 있고, 측근에게 배신당해 서거한 부친의 영향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심복이 없다 보니 ‘충성 경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세종시 논란이 대표적이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친박계 의원들은 야당보다 더 야당스럽게 정운찬 총리를 몰아붙였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으로 통하는 이정현 의원은 “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 정권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 어디서 잘살고 잘 먹고 편하게 지내다 이따위 소리를 하는가”라며 박 전 대표를 비판한 ‘친이(친이명박)계’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조원진 의원은 세종시 수정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자료를 들이대 박 전 대표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역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부와 친이계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한선교 의원은 박 전 대표의 남동생인 지만씨와 절친한 친구로 알려졌다. 친박계 좌장 격으로 통했던 김무성 의원은 지난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 과정부터 박 전 대표와 다소 소원해졌다. 박 전 대표가 당시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에 반대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최근에도 김의원이 “세종시법을 수정해야 한다”라고 말해 분위기는 더 냉랭해졌다.

실체 드러나지 않은 교수 등 자문 그룹도 활약

▲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해 12월9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여의포럼 망년 만찬에 참석해 포럼 소속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다 보니 친박계 내의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친박계 내에서도 이른바 ‘신주류’와 ‘구주류’가 따로 존재하는데, 구주류에서 신주류로의 이동 현상을 말한다.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지난 7월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박 전 대표의 ‘반대표 행사’ 발언으로 여권이 발칵 뒤집힌 와중에 친박계 중진들이 홍사덕 의원실에 모여 이정현 의원을 불렀다. 친박계 중진들은 “박 전 대표가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이의원이) 좀 순화시켜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이의원을 나무랐다. 이의원은 중진들로부터 꾸중을 듣는 중에 휴대전화가 오자 전화를 받는 척하며 슬그머니 나가버렸다는 후문이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했던 일부 의원들은 요즘 박 전 대표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 구주류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신주류로 불리는 친박계의 한 의원은 “한 번 실패한 사람은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2012년 대선에서는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며 ‘은근히’ 구주류 인사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구주류 의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것이 박 전 대표를 돕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원외 인사들로부터 자문을 받는다. 미디어법만해도 박 전 대표의 책상에 올라온 보고서가 8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자문 그룹의 실체는 일절 베일에 싸여 있다. 박 전 대표가 철저히 함구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다. 친박계 인사들은 “박 전 대표가 자문을 받는 교수진은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수)가 아니다. 폴리페서라면 벌써 소문이 났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문 그룹에는 2007년 대선 경선 캠프에서 특별대책기구에 소속된 인사들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차동세 전 KDI 원장, 이상주 전 교육부총리 등이 눈여겨볼 인사들이다.

2007년 대선 경선 캠프에서 활동했던 원로 그룹도 박 전 대표에게 정책적 조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3공화국 재무 관료 출신의 김용환 전 의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조선일보 부사장 출신의 안병훈 기파랑 이사장 등이 원로 그룹의 중심이다. 지난 4월 경주 재선거 때 정수성 의원이 출마한 것도 원로 그룹의 강력한 권고로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안이사장은 “박 전 대표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느냐. 요즘에는 (박 전 대표)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박 전 대표의 신뢰를 받는 원로 그룹이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젊은 그룹의 모임도 있다. 대선 경선 캠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인사들이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난다. 대선 경선 캠프 사무실이 차려졌던 빌딩 이름인 ‘엔빅스’(ENBIGS)를 모임 명으로 사용한다. 국회에서는 ㅈ의원실 및 ㅅ의원실의 관계자 등이 중심 역할을 한다. 실무팀의 모임에 친박계 의원들이 서로 ‘후원’하려고 안달이 났다는 얘기도 들릴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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